그렇게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로 그해 한겨레 문학상에 응모를 했고 결과는 수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왕에 응모한 마당에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심사 경위를 소개하는 기사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기사 중간에 내가 응모했던 소설 제목이 보이는 것이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여덟 편의 작품들 속에 섞여 있었고, 그중 네 편으로 압축되어 주로 논의된 작품들에도 포함된 것이었다. 수상자는 따로 있었지만, 그 기사를 보고 있던 나는 내내 좀 멍한 상태였다.
그래도 처음 쓴 장편소설로 본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쁘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동전의 뒷면처럼 붙어 드러난 감정은 차라리 언급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 느껴질 정도의 쓰라림과 좌절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나는 안 되는 건가, 하는 그런 해묵은 자조마저 나를 휩쌌다. 최종 본심에서 좌초되었다는 그 간발의 아쉬움 때문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의 크기는 더 크고 깊어지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한껏 찾아들었고. 시간과 에너지를 모아 쓴 소설이 다행히 본심에는 올랐지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후보작에 불과했다. 심사평이 실린 기사를 몇 차례나 반복해 보고 곱씹어 볼수록 어쩐지 참담해졌고. 이렇게 있다가는 앞으로 문학상 본심에 오른 경험을 추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언젠가 과거의 심사평 기사를 들먹이면서 이때 수상했어야 했는데, 하고 회한에 빠져 웃었다 울었다 미친 사람처럼 소주잔을 붙잡고 주정이나 부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정신이 번쩍 떠졌다. 본심에 올랐다는 사실에 함몰되어 있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 사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아쉬움만 되새김질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떻게든 또다시 돌파구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내가 만들어 놓은 좌절의 구덩이에 빠진 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
쓴다고 해서 소설가로서의 밝은 미래가 엿보이거나 보장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될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쓰는 것 밖에는 없었고, 장편 소설을 한 편 더 쓰기로 결심했다. 몸과 마음의 기운이 다 어딘가로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써야겠다고. 다른 길은 없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의 합법 논란이 한창이었다. 택시 업계와 마찰까지 빚었던 이 논란은 타다 서비스의 종료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서비스 혹은 기술의 등장이 등장할 때 이를 충분히 수용할 만한 정책이나 법규,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었다. 택시만 해도 정부가 개입해 생산량과 가격을 규제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차별화를 통한 경쟁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택시와 차별화하면서 소비자 편의를 촉진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자 갈등이 빚어지게 된 것이었다. 타다 뿐만이 아니었다. AI 기술이 확장되면서 저작권에 대한 침해 역시 갈등 요소로 불거지고 있었다. 한창 그런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한집에 같이 사는 U가 내게 스타트 업계에서도 AI 자동화 기술을 통한 무인화 서비스가 큰 물결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며 한 마디를 건넸다. 그것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냐고. 마침 갖고 있던 관심사와도 겹쳐 있는 주제였기에 그런 내용들을 함께 엮어 써보기로 다짐했다. 제목은 「언맨드」로 결정하고.
자주 U와 써야 할 소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무더운 여름에 쓰기 시작했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 방의 불을 꺼놓은 채 U와 나 사이에 아이를 눕혀놓고 잠을 재우면서 로봇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그 밤이 문득 생각난다. 잠자리에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 게 조금은 비현실적이고, 또 너무나 현실적이기도 해서 잠자리에 누운 채 설핏 웃음이 났던 기억도 난다. 아이가 잠에 들면 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 스탠드에 불을 켜놓고 머릿속에 축적된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자지 못한 채 출근하고 일을 마친 후 돌아와 밤에는 글을 썼다. 회사 일은 회사 일대로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몸과 정신이 극도로 피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는 것이 절실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쓴 「언맨드」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세계문학상에 나는 두 개의 작품을 공모했었다. 「언맨드」와 지난 한겨레문학상에서 본심까지 올랐던 그 작품이었다. 심사평이 담긴 기사에서 나는 그 두 개의 작품 모두가 언급되는 것을 목도한다. 최종 본심에서 마지막으로 압축된 네 개의 작품 중, 두 개의 작품이 나의 것이었고, 그중 하나인 「언맨드」로 수상하게 된 것이었다.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지만 얻게 된 것 하나와 잃은 게 있었다. 하나는 수상으로 인해 글을 더 쓸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얻었다면 잃은 건 약간의 건강이었다. 그동안 쌓인 과로가 징후가 몸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그 이후부터 나는 무리하지 않고 오래 글을 써갈 수 있는 방법을 차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은 기뻤음에도, 모종의 불안이 또다시 슬금슬금 내 곁으로 찾아들었다. 세계문학상 수상 당시에는 팬데믹 상황이 절정인 데다가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분위기가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에야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출판사이지만, 그때는 출판 시장에서 나름 분투하는 중이었다. 책이 출간한 시기와 엇비슷한 시기 그때 그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른 장편소설이 전례없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내가 쓴 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반면, 그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갔다. 출판사와 함께 성장하는 건 좋았지만 내심 복잡한 심정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쯤 되자 내성이 생긴 걸까. 너무 큰 기쁨도 또 좌절도 없이 나는 담담히 내일의 할 일을 준비하게 된다. 그건 바로 쓰는 일. 내게 쓰는 일은 그런 것 같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세상에 내어줄 의미를 채워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김하게 되고.
청탁이 오지 않아도 매일 뭔가를 쓴다. 아주 오래전부터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날들을 거쳐,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을 거치면서도 써가던 것이 이제는 오랜 나의 습관처럼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소설을 쓴다고 해서 곧바로 책으로 출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 번이나 최종심에 오른 그 소설은 여전히 나의 서랍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썼으나 발간할 수 없던 그간의 소설들과 함께. 쓰는 일 자체는 내게 언제나 거절과 실패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런 과정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담대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뚝심이 생겼다고 할까.
하지만 결과야 어떻든 어딘가 글이 보이는 것보다 우선 쓰는 게 중요했다. 쓰는 것만이 내 삶을 채우는 공기 같았다.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존재의 의미가 쓺 속에 담겨 있다 생각한다. 삶이 내게 요하는 그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에 너무 함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글쓰기가 삶의 전부라고 단정 짓고 만다면 그 외의 것들을 아무 가치 없다 여길까 두렵다. 그저 나는 나지막이 나 자신에게 속삭이곤 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나와 타인의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