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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기성 Nov 12. 2024

그럼에도 쓰는 날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로 그해 한겨레 문학상에 응모를 했고 결과는 수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왕에 응모한 마당에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심사 경위를 소개하는 기사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기사 중간에 내가 응모했던 소설 제목이 보이는 것이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여덟 편의 작품들 속에 섞여 있었고, 그중 네 편으로 압축되어 주로 논의된 작품들에도 포함된 것이었다. 수상자는 따로 있었지만, 그 기사를 보고 있던 나는 내내 좀 멍한 상태였다.      


그래도 처음 쓴 장편소설로 본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쁘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동전의 뒷면처럼 붙어 드러난 감정은 차라리 언급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 느껴질 정도의 쓰라림과 좌절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나는 안 되는 건가, 하는 그런 해묵은 자조마저 나를 휩쌌다. 최종 본심에서 좌초되었다는 그 간발의 아쉬움 때문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의 크기는 더 크고 깊어지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한껏 찾아들었고. 시간과 에너지를 모아 쓴 소설이 다행히 본심에는 올랐지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후보작에 불과했다. 심사평이 실린 기사를 몇 차례나 반복해 보고 곱씹어 볼수록 어쩐지 참담해졌고. 이렇게 있다가는 앞으로 문학상 본심에 오른 경험을 추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언젠가 과거의 심사평 기사를 들먹이면서 이때 수상했어야 했는데, 하고 회한에 빠져 웃었다 울었다 미친 사람처럼 소주잔을 붙잡고 주정이나 부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정신이 번쩍 떠졌다. 본심에 올랐다는 사실에 함몰되어 있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 사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아쉬움만 되새김질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떻게든 또다시 돌파구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내가 만들어 놓은 좌절의 구덩이에 빠진 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쓰기 시작하는 것.      


쓴다고 해서 소설가로서의 밝은 미래가 엿보이거나 보장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될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쓰는 것 밖에는 없었고, 장편 소설을 한 편 더 쓰기로 결심했다. 몸과 마음의 기운이 다 어딘가로 빠져나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써야겠다고. 다른 길은 없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의 합법 논란이 한창이었다. 택시 업계와 마찰까지 빚었던 이 논란은 타다 서비스의 종료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서비스 혹은 기술의 등장이 등장할 때 이를 충분히 수용할 만한 정책이나 법규,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었다. 택시만 해도 정부가 개입해 생산량과 가격을 규제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차별화를 통한 경쟁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택시와 차별화하면서 소비자 편의를 촉진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하자 갈등이 빚어지게 된 것이었다. 타다 뿐만이 아니었다. AI 기술이 확장되면서 저작권에 대한 침해 역시 갈등 요소로 불거지고 있었다. 한창 그런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한집에 같이 사는 U가 내게 스타트 업계에서도 AI 자동화 기술을 통한 무인화 서비스가 큰 물결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며 한 마디를 건넸다. 그것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냐고. 마침 갖고 있던 관심사와도 겹쳐 있는 주제였기에 그런 내용들을 함께 엮어 써보기로 다짐했다. 제목은 「언맨드」로 결정하고.      


자주 U와 써야 할 소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무더운 여름에 쓰기 시작했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 방의 불을 꺼놓은 채 U와 나 사이에 아이를 눕혀놓고 잠을 재우면서 로봇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그 밤이 문득 생각난다. 잠자리에서 아이를 사이에 두고 그런 얘기를 나눈다는 게 조금은 비현실적이고, 또 너무나 현실적이기도 해서 잠자리에 누운 채 설핏 웃음이 났던 기억도 난다. 아이가 잠에 들면 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 스탠드에 불을 켜놓고 머릿속에 축적된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자지 못한 채 출근하고 일을 마친 후 돌아와 밤에는 글을 썼다. 회사 일은 회사 일대로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몸과 정신이 극도로 피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는 것이 절실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쓴 「언맨드」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세계문학상에 나는 두 개의 작품을 공모했었다. 「언맨드」와 지난 한겨레문학상에서 본심까지 올랐던 그 작품이었다. 심사평이 담긴 기사에서 나는 그 두 개의 작품 모두가 언급되는 것을 목도한다. 최종 본심에서 마지막으로 압축된 네 개의 작품 중, 두 개의 작품이 나의 것이었고, 그중 하나인 「언맨드」로 수상하게 된 것이었다.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지만 얻게 된 것 하나와 잃은 게 있었다. 하나는 수상으로 인해 글을 더 쓸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얻었다면 잃은 건 약간의 건강이었다. 그동안 쌓인 과로가 징후가 몸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그 이후부터 나는 무리하지 않고 오래 글을 써갈 수 있는 방법을 차츰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은 기뻤음에도, 모종의 불안이 또다시 슬금슬금 내 곁으로 찾아들었다. 세계문학상 수상 당시에는 팬데믹 상황이 절정인 데다가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분위기가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에야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출판사이지만, 그때는 출판 시장에서 나름 분투하는 중이었다. 책이 출간한 시기와 엇비슷한 시기 그때 그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른 장편소설이 전례없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내가 쓴 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반면, 그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갔다. 출판사와 함께 성장하는 건 좋았지만 내심 복잡한 심정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쯤 되자 내성이 생긴 걸까. 너무 큰 기쁨도 또 좌절도 없이 나는 담담히 내일의 할 일을 준비하게 된다. 그건 바로 쓰는 일. 내게 쓰는 일은 그런 것 같다.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세상에 내어줄 의미를 채워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김하게 되고.      


청탁이 오지 않아도 매일 뭔가를 쓴다. 아주 오래전부터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저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날들을 거쳐,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을 거치면서도 써가던 것이 이제는 오랜 나의 습관처럼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소설을 쓴다고 해서 곧바로 책으로 출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 번이나 최종심에 오른 그 소설은 여전히 나의 서랍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썼으나 발간할 수 없던 그간의 소설들과 함께. 쓰는 일 자체는 내게 언제나 거절과 실패를 동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런 과정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담대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뚝심이 생겼다고 할까.       


하지만 결과야 어떻든 어딘가 글이 보이는 것보다 우선 쓰는 게 중요했다. 쓰는 것만이 내 삶을 채우는 공기 같았다.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존재의 의미가 쓺 속에 담겨 있다 생각한다. 삶이 내게 요하는 그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에 너무 함몰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글쓰기가 삶의 전부라고 단정 짓고 만다면 그 외의 것들을 아무 가치 없다 여길까 두렵다. 그저 나는 나지막이 나 자신에게 속삭이곤 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나와 타인의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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