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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성 Feb 07. 2021

도착했습니다, 지나갑니다

겨울

11월 즈음엔가 튤립 구근을 물에 넣고나서부터 실제로 꽃을 피어나기까지 두어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는데 그렇게 두 번만 반복하면 황량한 계절에도 색이 기억에 남아 조금은 유의미해지는 것 같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동안은 사람이 유치해지는 시간이라 꽃이 피어날 때까지도 못 본 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었더니 언제 집 안에도 사무실에도 꽃들이 가득 피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원예용 튤립 중에서도 겹꽃을 가진 종들은 사람이 그저 관상용으로만 만들어낸 품종이라 내버려 두고 스스로 살기에는 고질병이 몇 개 있다.

대가리가 너무 커서 꽃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목이 뚝 부러져 있다던지 뭐 그런.

꽃이 피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꼭 그럴 땐 며칠간 정신없이 바빠지고 이내 고작 그 며칠 사이에 망가진 꽃들을 보며 내 겨울의 반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됐다는 것에 작은 허탈감을 느낀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순식간에 물을 빨아올리는데 눈치 못 채고 하루 이틀 잠깐 구경하다 보면 순식간에 몸속의 있던 수분까지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말라비틀어진다.

물에 담그고 기다렸던 몇십 일을 생각하면 모래시계 속 모래가 떨어질 때 마지막 몇 초를 남겨놓고 갑자기 쑥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찰나 같은 시간이다.

봄이 오기 전에 한번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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