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버티는 방법.

by 조민성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감동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자체가 조금 웃기지만 만약 그런 순간이 있다면 전제가 여러 가지 붙을 것 같다.

- 내가 그날 처음 입어봤던 옷이 생각지도 못하게 잘 어울린다던가.


-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잡티 하나 없이 개운한 얼굴이라던가.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작업이 하나 끝날 때까지 수염을 잘 안 깎는 버릇이 있는데 며칠에 걸친 작업을 마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을 때, 면도를 하면서 혼자만 아는 묘한 성취감과 함께 감동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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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런 전제나 과정 없이 순수하게 존재 그 자체로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수선화의 모태가 되는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에게 취해 한없이 바라보다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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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수선화를 좋아하는 나도 살면서 내 얼굴을 보며 그 정도로 자의식이 충만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어릴 때 한약을 잘못 먹었었나-앞으로도 내가 거울을 보면서 내 존재 자체에 감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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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꽃들에게 둘러싸이다.


난 매년 봄날이면 몇 달 동안 갖가지 꽃들에게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 안에서 '와 예쁘다'하는 순수한 감동까진 아니고 살짝 다른 느낌의 행복은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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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게 비유하자면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가루를 갈고 꾹꾹 눌러 담은 후에 잠깐 기다리다 스팀 소리를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2년 정도 다닌 직장에서 4월 달 월급 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의 성취감, 안도감, 며칠 뒤면 꽃이 질 거라는 사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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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눈길이 꽃으로 향하면 '감상'보다는 '관찰'이 시작되면서 내가 꼼꼼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아예 실수한 흔적들은 그 숫자만큼 나를 불편하게 한다.


꽃이 직업이 되던 순간부터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겼는지 어떤 전제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떼놓고 구경하듯 보는 게 불가능해졌다.





텁텁한 커피 맛.


커피콩을 넣어놓은 유리병 뚜껑에 틈이 있었는지 커피를 내려서 마시자마자 텁텁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봄날 내내 그 맛을 느껴야 한다. 매일, 매 순간 꽃들을 볼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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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긴 심을 때 조금 신경 써서 심을 걸.

- 쟤네는 조금 더 밖으로 뺐어야 했는데.

- 왜 저걸 저기에 저따위로 심었지?

- 여기 아니었나?

- 아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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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니오에게 모든 걸 잊고 토끼굴 밖으로 벗어나는 파란 약과 불편한 진실과 함께 시궁창 속으로 떨어지는 빨간약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그때 만약 모피어스가 니오에게 참고로 빨간약은 더럽게 맛없다고 미리 언질을 해줬다면 결말이 조금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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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빨간 약을 골랐겠지. 먹어보기 전까진 모르니까.





토끼굴 속.


니오가 그랬듯 나도 빨간 약을 골랐는데 니오는 머리가 빡빡 밀려 시궁창에 내팽개쳤지만 난 숲으로 떨어졌고 머리카락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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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두상도 별로 안 예쁜데 참 다행이다.


니오는 영화 내내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쥐어터지다 죽어도(가만히 지켜보면 진짜 불쌍하다) 난 어떻게 하면 화려한 꽃들을 야생에서 잘 자랄 수 있게 만들까에만 온전히 집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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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점수가 나오는 계절이고 주변에 예쁜 꽃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행복하게 보낼 순 없지만 나름의 보람과 성취, 약간의 소명의식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내 직업을 마주할 수 있다.


꽃밭 아래에는 그런 토끼굴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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