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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버티는 방법.
by
조민성
Oct 22. 2019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감동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자체가 조금 웃기지만 만약 그런 순간이 있다면 전제가 여러 가지 붙을 것 같다.
- 내가 그날 처음 입어봤던 옷이 생각지도 못하게 잘 어울린다던가.
-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잡티 하나 없이 개운한 얼굴이라던가.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작업이 하나 끝날 때까지 수염을 잘 안 깎는 버릇이 있는데 며칠에 걸친 작업을 마치고 초췌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을 때, 면도를 하면서 혼자만 아는 묘한 성취감과 함께 감동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과연 이런 전제나 과정 없이 순수하게 존재 그 자체로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수선화의 모태가 되는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에게 취해 한없이 바라보다 죽었다고
한다.
정작 수선화를 좋아하는 나도 살면서 내 얼굴을 보며 그 정도로 자의식이 충만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어릴 때 한약을 잘못 먹었었나-앞으로도 내가 거울을 보면서 내 존재 자체에 감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음 생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꽃들에게 둘러싸이다.
난 매년 봄날이면 몇 달 동안 갖가지 꽃들에게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 안에서 '와 예쁘다'하는 순수한 감동까진 아니고 살짝 다른 느낌의 행복은 가진다.
가깝게 비유하자면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가루를 갈고 꾹꾹 눌러 담은 후에 잠깐 기다리다 스팀 소리를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2년 정도 다닌 직장에서 4월 달 월급 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의 성취감, 안도감, 며칠 뒤면 꽃이 질 거라는 사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등.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눈길이 꽃으로 향하면 '감상'보다는 '관찰'이 시작되면서 내가 꼼꼼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아예 실수한 흔적들은 그 숫자만큼 나를 불편하게 한다.
꽃이 직업이 되던 순간부터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겼는지 어떤 전제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떼놓고 구경하듯 보는 게 불가능해졌다.
텁텁한 커피 맛.
커피콩을 넣어놓은 유리병 뚜껑에 틈이 있었는지 커피를 내려서 마시자마자 텁텁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봄날 내내 그 맛을 느껴야 한다. 매일, 매 순간 꽃들을 볼 때마다.
- 저긴 심을 때 조금 신경 써서 심을 걸.
- 쟤네는 조금 더 밖으로 뺐어야 했는데.
- 왜 저걸 저기에 저따위로 심었지?
- 여기 아니었나?
- 아 xx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니오에게 모든 걸 잊고 토끼굴 밖으로 벗어나는 파란 약과 불편한 진실과 함께 시궁창 속으로 떨어지는 빨간약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그때 만약 모피어스가 니오에게 참고로 빨간약은 더럽게 맛없다고 미리 언질을 해줬다면 결말이 조금 바뀌었을까.
그래도 빨간 약을 골랐겠지. 먹어보기 전까진 모르니까.
토끼굴 속.
니오가 그랬듯 나도 빨간 약을 골랐는데 니오는 머리가 빡빡 밀려 시궁창에 내팽개쳤지만 난 숲으로 떨어졌고 머리카락도 지켜냈다.
난 두상도 별로 안 예쁜데 참 다행이다.
니오는 영화 내내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쥐어터지다 죽어도(가만히 지켜보면 진짜 불쌍하다) 난 어떻게 하면 화려한 꽃들을 야생에서 잘 자랄 수 있게 만들까에만 온전히 집중하면 된다.
봄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점수가 나오는 계절이고 주변에 예쁜 꽃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냥 행복하게 보낼 순 없지만 나름의 보람과 성취, 약간의 소명의식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내 직업을 마주할 수 있다.
꽃밭 아래에는 그런 토끼굴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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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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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서 야생화를 가꾸고 있습니다. 5.6헥타르의 숲 속에서 생기는 사람과 식물,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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