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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인심
by
조민성
Oct 20. 2019
"와 시골이다."
사람들은 보통 차를 타고 가다 논두렁 하나만 나오면 이렇게 생각하고 급기야 입으로 내뱉는 경향이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조금 더 나아가 시골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면 포근하고 안락한 집, 표준어와는 살짝(혹은 많이) 다른 말투와 단어,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등을 떠올린다.
그대로 지나치기만 하면 참 좋겠지만 굉장히 서로 곤란해지는 때가 바로 어떤 이유에서건 같이 대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이때부터 '시골사람'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은 문제 소지가 되기 시작한다.
마법의 단어.
'시골 사람', '시골 학교', '시골 할머니', '시골 할아버지', '시골애들', '시골 인심', 시골 시골 시골-
어떤 단어든지 시골만 붙이면 마법처럼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순박하고 정 많게 변한다.
'시골 깡패', '시골 단란주점', '시골 정치인', '시골 검찰', '시골 사이코패스', '시골 도둑' 시골 시골 시골 시골-
트렌디한 단어 앞에 붙이면 갑자기 확 구려지기도 한다.
'시골 힙합', '시골 시티팝', '시골 클럽', '시골 홍대', '시골 노트10', '시골 애플', '시골 삼성전자' 시골 시골 시골-
이렇게 똑같은 개념도 시골을 앞에 붙이면 좋게 말해서 '편안'하고 나쁘게 말하면 '만만'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에 대해 딱히 나쁜 감정은 없지만 정작 자신에게 시골이라는 단어가 붙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아닌 것 같으면 누군가 자신의 이름 앞에 '시골'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부른다고 상상해보자.
그래도 기분 좋다는 사람에겐 전원생활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시골 사람에 대한 기대.
자신의 직장, 생활, 주 활동 범위가 논두렁에서 벗어나 문명에서 가까워질수록 자신을 100% 시골사람에서 점점 90%, 80%, 60%로 멀리 두는데 같은 면 단위에 살아도 논두렁만 안 보이면 어디 가서 자기가 시골사람이라는 얘길 일절 안 하게 된다.
그렇게 덜 시골사람이나 진짜 도시 사람들은 찐 시골사람을 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시골 사람'대하듯 대하게 되면서 '인심', '정', '순박함'을 자기도 모르게 기대하며 이내 거의 강요 수준으로 바뀐다.
동네에는 매월 1일과 6일마다 5일장이 들어서는데 타지에서 온 사람이 뭘 사려다 흥정이 안 통하면 무심코 뱉는다.
"시골 인심 다 죽었네 진짜."
막상 그 5일장에 오는 상인들 중엔 장터마다 떠도는 분들도 많은데 시골 장터에서 장사하면 이런 얘기를 듣고 가셔야 된다.
듣는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정작 내뱉는 사람도 시골이 타락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뱉는 말이다.
내가 산에 나물 캐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야 하는 얘기가,
"시골 인심 참 팍팍하네."
라는 말인데 들을 때마다 차 트렁크에 있는 독일제 원형톱과 스위스산 전기톱을 꺼내서 정말 평생 기억날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주고 싶다. -에라이 이게 바로 시골 인심이다 맛 좀 봐라아아아 위이이이이이잉-
시골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친절해야 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한데도, 정작 시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이 어디서 뭐하다 온 사람인지 모르는데도, 시골이라는 배경이 주는 존재감은 참 압도적인가 보다.
내 마음의 풍금.
감성 터지는 90년대 레트로 영화 중에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이병헌, 전도연 주연의 작품이 있는데 당시에는 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던 명작이다.
강
원도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골학교 선생님(이병헌)을 짝사랑하던 체급 초과의 여학생(전도연)의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인데 같은 카테고리의 황순원 작 '소나기'의 뺨을 후려갈길 정도로 불후의 명작이다.
동네에서 처음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던 날 그 영화가 떠올랐다.
- 뭔가 순수하지 않을까. 순진하겠지. '시골 애들'이니까.
- 내 마음의 풍금. 캬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제일 순수했다.
지금도 학원에서 내가 제일 순수한 것 같다.
나는 화장도 안 하고, 유행도 안 타고,
취미라고 있는 게
음악 듣고, 그림 그리고, 장난감 모으고, 꽃 키우고 책 읽다가 개밥 주는 건데,
아니 무슨 애들이 화장하고 다니질 않나, 남자애들도 입술에 빨간 걸 칠하지 않나, 조금 모르는 말만 나오면 바로 휴대폰으로 검색하지,
에어팟은 무슨 안경끼듯 다 끼고 다녀,
말대꾸 따박따박하다가 결국 이단옆차기 날아가고.
내 마음의 풍금은 진짜 내 마음속에서만 간직하기로 했다.
열심히 일해서 중고로 풍금 하나 산 다음 집에서 혼자 칠 거다.
시골 인심 다 죽었다.
가만 보면 나 혼자 시골 사람 같다.
내가 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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