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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슬픈 노래가 흐르는 사무실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미소는 가성비가 좋다. 큰 노력이 필요치 않은데도 즉각적으로 상대가 경계를 늦추고 마음을 열게끔 만든다. 웃는 본인 역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덤. 페이셜 피드백 가설(Facial Feedback Hypothesis)에 따르면 미소를 지을 때 뇌가 실제로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착각한다니 말이다. 아, 물론 언제나 강제로 친절해야하는 고된 서비스업은 예외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러니 평소 "굳이 무표정일 필요가 있나" 마인드를 가지고 살던 나는 "굳이 웃을 필요 있나"는 직원과 대표의 태도가 조금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허나 다행히도, 인수인계를 맡은 아르바이트 선임자는 퍽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사실 영혼이 있건 없건은 내 관심 밖이다. 행여 남직원은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사람이고, 선임자는 속으로 나를 욕하는 가식적인 사람일지라도, 나는 선임자 같은 사람과 일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내게 있어 [웃으려는 노력]은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성의를 뜻했으니까. 단순히 기계적인 리액션이 아닌, 내가 본인과 마주친 이 상황을, 그리고 함께 있는 이 공간을 편하게 느꼈으면 하는 자동적인 배려로 여겨졌다. 솔직히 일터에서 만난 사람 속내까지 들여다볼 여력도 의향도 없기도 하다. 그저 업무 할 때만은 하하 호호 사이좋게 지내는 척이라도 하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너는 네 삶, 나는 내 삶으로 돌아가면 그만 아닐까.






나는 친절한 선임자 덕분에 주눅들었던 어깨를 펴고 금세 사회성을 충전한 뒤, 조잘대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나 둘 시작했다.


면접때 아주 간략히 배운 대로, 아르바이트 업무는 간단했다. 해외에서 수입해 온 옷이나 잡화를 검수하고 택배박스에 재포장하는 일이었다. 택배박스는 노트북에 기입된 대로 송장을 붙인 뒤 한쪽 구석에 쌓아두면 다음 날 택배기사님이 전부 수거해 가신다고 한다.


선임자는 내게 검수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점, 그리고 빠르게 포장하는 방법 등을 알려줬다.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있는 작업이었다. 택배박스가 몇 개 없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인수인계를 한창 받던 중 대표로 보였던 40대 오프화이트(옷을 입은)남이 들어왔다. 그런데 또 의아한게,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선임자에게 인사 한 마디 없이 쌩- 지나간다. 그리고는 그런 대표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남직원 옆자리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했다. 남직원은 이내 일어나 담배를 피우려 발코니로 향했다.


선임자는 대표와 남직원을 슬쩍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인수인계를 이어갔다. 빠른 담배타임 후 돌아온 남직원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시 모니터를 노려봤다. 여전히 대표와 남직원, 그리고 선임자는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체 누가 틀었는지, 그저 M.C the MAX의 [행복하지 말아요]가 구슬프게 흐를 뿐이었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선임자는 작업대에 기대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옆에서 어정쩡하게 선 채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핀 뒤 선임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 혹시 대표 두 분이 사이가 안 좋나요..?


선임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 저도 처음에 그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원래 저래요. 두 대표님이 친구더라고요. 중학교 때부터 친구라나. 그래도 가끔 보면 서로 말도 해요.


응? 남직원도 대표라고? 그리고 둘이 동갑? 한 명은 20대로, 다른 한 명은 40대로 보였는지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나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 그런데 물은 어디서 마시나요?

- 아마 저거 사용하면 될걸요?


두 달 넘게 일했다는 선임자는 한 번도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 아, 화장실 비밀번호도 알려드릴게요. 여기, 이거 맞을 거예요.


노트북에 적힌 번호를 가리키며 선임자가 말했다. 화장실도 가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 사실 잘 몰라요. 전 그냥 빨리 포장하고 집에 가고 싶어서.


선임자는 큼지막한 개인 텀블러를 홀짝거렸다. 그리고는 멀뚱히 서있는 내게 물었다.


- 어려운 건 없죠?

- 내일 더 배워봐야 알 것 같지만... 우선은 괜찮은 것 같아요.

- 잘하실 것 같던데요. 지난번 인수인계 해드렸던 분은 아주머니셨거든요. 근데 여기 분위기 적응 안 된다면서 못하겠다 하시더라고요. 다들 둘이 싸웠나 물어보데. 근데 전 사실 좋아요. 나도 뭐, 친구 사귀러 온 것도 아니고.

- 근데 저도 말 많이 거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요. 조용히 포장하고 싶어서 온 거라.

- 맞아요. 사실 뭐, 나도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 다시 시작할까요?


조금의 휴식이 끝나고 선임자는 인수인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이런저런 업무와 관련 없는 정보들도 알려줬다.


- 그거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요. 오늘은 몇 개 없는데 포장할게 많은 날도 있거든요. 그런 날은 대충대충 해야 돼요. 요즘 점점 바빠지더라고요? (소근) 사업 잘 되나 봐요. 대표들 나랑 동갑이던데.

- 아 그래요?

- 그렇던데요. 둘 다 애아빠 일걸요. 확실하진 않아요. 뭐 저도 딱히 궁금하지 않고.


궁금하지 않다는 말과는 달리 선임자는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얘기가 대표들에게 들릴까 조금 염려됐지만, 크게 들리는 엠씨더맥스의 열창에 대충 묻히는 모양이었다.


사업이 잘 된다는데도, 대표들은 자리에 앉은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수차례 쉬다, 번갈아가며 발코니 담배릴레이를 이어갔다. 확실히 아직은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사무실엔 박스테이프를 붙이는 소리와 이수의 서러운 통곡만이 울려 퍼졌다.


여름이었다...






인수인계 이틀차이자 마지막 날.


출근 전 나는 커피를 사기 위해 회사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커피의 금액은 대충 2500원. 회사 다닐 때 죄책감 없이 마시던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가격의 반값 정도.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비싸게 느껴졌다. 나는 하나만 필요한데도 굳이 2+1, 1+1 커피들을 스캔해 봤다. 그리고는 나머지 한 두 개의 쓸모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세 개까진 오버고 두 개로 결정. 그렇게 나는 오천 원을 지불하고 커피 두 병을 얻었다. 물론 편의점 바로 옆에 투썸플레이스가 있었고, 그곳에서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면 결론적으로 500원을 덜 쓴 셈이었지만... 여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괜찮다. 나만 마시면 정 없다. 어제 선임자의 인수인계는 친절했고 훌륭했다. 지극히 합리적인 소비였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니 선임자, 그리고 20대로 보였던 40대 대표가 먼저 와 있었다. 바닥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큰 박스 두어 개가 보였다. "오늘도 포장할 의류가 별로 없다"는 말을 하는 선임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포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선임자에게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부담이 될까 "1+1 행사상품이었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선임자는 커피를 못 마신다며 거절했고, 이에 나는 "그럼 저기 계신 대표님 드려야겠다"라는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런데 선임자가 조금 당황하더니 "굳이..."라는 말과 함께 "아... 그럼 줘보세요"라는 뜻 모를 말을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인상 쓰고 있던 대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또, "편의점에서 1+1 행사상품이었다"는 말과 함께 커피를 건넸다. 남는 커피 하나 주는 일은 별거 아니지 않나. 하지만 대표는 마치 엄청난 별거인 양 얼굴이 뻘게지더니, 선임자가 예견했듯 '굳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선임자의 반응이 이해가가 갔다. 대표는 마지못해 커피를 받아 들었지만, 보는 내가 더 민망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지랖이었나. 그래도 웃었으니 됐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작업대로 돌아온 나는 간편하게 '단돈 500원으로 희귀한 (억지) 웃음을 샀다'며, '역시나 합리적인 소비였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조금 뿌듯해지기까지 한 나는 '이대로 조금씩 편해져야겠다'라는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물류가 워낙 적어 포장은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선임자는 노트북에 알바-친화적으로 업무 종료 시간을 입력한 뒤(실제보다 일찍 도착, 실제보다 늦게 퇴근), 조금 머뭇거리다 대표의 자리로 찾아갔다. 대표는 웬일로 벌떡 일어서더니, 예의 그 심각한 표정으로 그간 잘해줘서 감사했다며, 여태 알바 중 제일 잘해줬다며 선임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선임자는 낯선 소리라도 들은 양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한층 다정해진 분위기에 나는 괜히 덩달아 마음이 훈훈해졌다.


선임자는 마지막으로 그날의 불량품들을 대표에게 브리핑했다. 그중에는 실수로 두 개가 오배송된 토리버치 팔찌가 포함돼 있었다. 대표는 신경 쓰지 말라며, 작업대 위에 두고 가라 말했고, 나는 이에 대수롭지 않은 장난을 던졌다.


- 앗 그거 선임자분 퇴사선물 아니었어요?


대표는 0.1초의 지체 없이,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 아닌데요.


말도 안 되는 나의 질문에 선임자는 당연히 농담이겠거니 웃었지만, 대표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 이건 판매가가 ㅇㅇ만 원이에요. 그건 힘들 것 같고, 대신 (두리번)...이 5% 할인 쿠폰드릴게요.


서먹한 사이에서 내 농담이 섣불렀던 걸까. 괜히 오버했던 걸까. 대표는 나의 장난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를 방금 10초 전에 겪고도, 나는 계좌번호를 묻는 대표에게 또 다시 아무말을 던졌다.


- 주급은 금요일 저녁마다 보내드릴거예요. 계좌번호 여기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 당근페이로 보내주시는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대표는 다시금 궁서체로 대답했다.


- 아닌데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당근페이? 그걸로 보내드려요? 아직 한 번도 안 해봐서요. 방법을 한 번 찾아볼게요."


당근알바 공고는 다른 대표가 올린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표는 농담을 받아줄 의향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과 거리를 두는 나름의 규칙, 혹은 그냥 철벽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선임자만 내 드립에 웃어보였고, 나는 황급히 그냥 해본 말이라며 은행 계좌를 읊었다.





퇴근길, 홀로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일터에서 만난 사람과의 '적정 선'이란 무엇인지 생각에 잠겼다. 여태 지내왔던 회사 동료들과는 다른 분위기, 다른 결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게 될 앞으로가 염려되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부터는 상냥한 전임자 없이 홀로 두 대표와 일해야 한다. 이틀 치의 인수인계가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나 혼자 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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