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신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당근에 올라온 아르바이트 공고는 간략했다.
월~금 하루 두 시간 근무에 시급 13,000원이며, 택배량에 따라 간혹 초과시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럴 경우 당연히 초과시간은 별도로 지급해 줄 예정.
업무 내용도 명료했다. 의류 혹은 잡화 포장 후 송장 붙여주는 게 끝. 하루 15~30개 정도의 양이고, 무거운 박스를 드는 택배 업무는 아니라고 명시돼 있었다.
우대 조건은 딱 두 개였다. 1) 포장 업무 경험과 2) 장기간 근무 가능여부. 수긍 갈 정도의 간단한 조건이었다. 또한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아르바이트로 보였다.
우선 나는 포장 업무에 있어서 경력직이었다. 의류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의 사업 초창기 시절 몇 차례 도와주러 갔던지라 나름의 노하우도 있었다. 그리고 당장 어디 취직하거나 여행을 떠날 계획도 없었으니 장기 근무도 ssap가능.
딱히 뭐 하나 걸릴 게 없었다. 아, 고작 스무 개 언저리의 옷 포장이 두 시간이나 걸리나, 의아했던 것 빼곤. 하지만 예상보다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건데 뭐. 나는 '다른 곳보다 꼼꼼하게 포장하는 업체인가 보다~' 생각하며 대충 긍정회로를 돌렸다.
오후 3시 30분.
집 근처에서 탄 버스가 세 정거장을 지나쳐 아직은 낯선 동네에 도착했다. 폭염의 한가운데였다. 버스에서 내려 고작 10분가량 걸었는데도 땀이 선크림을 뚫고 올라왔다. 달라붙지 않는 펑퍼짐한 티셔츠가 조금씩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빤질빤질한 대리석 계단을 올라 2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도착했다. 투명 문 앞에 서니, 이것 또한 일 첫날이랍시고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괜한 긴장이 커지기 전에 얼른 문을 열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높은 텐션으로 밥벌이식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반대편 끝에 앉아 있던 남자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대표는 자리에 없는 듯했다.
".... 하세요."
들릴 듯 말 듯 직원은 모니터로 눈을 돌리곤 건조하게 인사를 흘렸다. 참 뭐랄까, 마뜩잖아 보였다. 마침 자리가 이 쪽 방향이어서,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앉아 있어서 억지로 하는 듯한 인사였다. 근데 뭐... 이런 분위기는 면접 때 익혔으니 대수롭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이 생각보다 더 쾌적하고 상쾌했다. 아니나 다를까, 둘러보니 벽면에 붙어있는 에어컨 온도 표시가 1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맺혔던 땀 덕에 더 시원했던 것 같다. 억지로 지었던 노동용 미소가 자연스레 유지됐다.
사무실은 면접 때 느꼈던 것보다 널찍하고, 심지어는 휑했다. 문쪽 벽면엔 큼지막한 포장용 작업대가 붙어 있었고, 그 옆 캐비닛에 포장용 박스가 채워져 있었다. 문 반대편 사무공간과 작업대 중간쯤엔 큰 테이블 하나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의자 여섯 개가 테이블을 빙 두르고 있었다. 왼쪽 벽에 있는 통유리창으로 여름볕이 가득 들어왔다. 신식 건물임을 증명하듯 바닥이 반짝였다.
"거기 아무 데나 가방 놓으세요."
한참을 어정쩡하게 둘러보고 있는데, 직원이 삐딱하게일어나며 말했다.
"전임자는 올 거예요."
"아, 넵….근데“
언제쯤 오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직원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재빨리 통유리창 오른쪽에 있는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직원은 내 또래로 보였다. 이번엔 면접 때 입고 있던 '스톤 아일랜드'가 아닌 '피어 오브 갓'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흰 티셔츠에, 안 그래도 마른 체형을 더 말라 보이게 만드는 타이트한 조거팬츠 차림이었다.
어후... 요즘도 저런 로고 플레이를 하는구나. 아냐 뭐, 취향인 거지.
근데 피죽도 못 먹은 듯 안색이.... 아냐, 인상이 원래 그런가 보지.
아무리 그래도 표정은 진짜 왜 계속 저따위... 아냐. 차이기라도 했나 보지.
아니 근데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 사적인 감정을 갖고 오나... 아니다. 무슨 일일 줄 알고.
사는 게 어지간히 힘든가 보지. 그렇지. 힘들지, 사는 거.
나는 애써 마음을 고쳐먹었다. 물론 피오갓 직원이 아주 쪼끔 겉멋 들어 보이고, 쪼끔 센척하는 것 같고, 그래서 쪼끔 한심해 보였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 만의 사정이 있을 터였다.
우환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 전염될세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베란다에 등 돌린 채 앉아 전임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후 4시 5분.
연카키색 탈색모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무실에 있던 피어 오브 갓 직원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직원들끼리 경쟁이라도 하는 걸까. 샛노란 티셔츠엔 보란 듯 '구찌'가 적혀 있었고, 신발, 가방, 그리고 핸드폰 키링까지도 저마다 '나 명품이요' 외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입장에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우물쭈물 바보 같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웬걸. 구찌녀는 뭔가 다르다. 이 사무실에선 본 적 없는 미소를 내게 지어 보였다. 때마침 저 멀리서 피오갓남이 구찌녀를 보곤 외쳤다.
"그분한테 배우심 돼요."
그에겐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해야 하는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피오갓남이 소리치자마자 구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잠깐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짓더니 눈알을 굴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알이 말을 했다. '아오 쟤 또 저러네~'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고 구찌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종족이었다. 그녀의 미소는 타성에 잔뜩 젖은 사회친화적 미소였다. 그리고 전부 자동적으로 나온, 그리고 기계적으로 지은 표정들이었다. 회사에서 상사가 재미없는 농담을 던질 때 옆자리 동료가 내게 보여준 얼굴이 딱 저랬다.
또한 구찌녀는 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전임자임을 깨닫자 갑자기 구찌녀가 친근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정상인이구나....
그렇게 구찌녀의 인수인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