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의 유효기간
걱정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갈까?
20대 중반. 회사에 취직한 뒤 불면증이 점차 심해졌다. 큰 계기나 사건은 없었다. 수면위생을 지켰음에도 잠드는 시간은 두 시간이 걸렸고, 중간에 깨는 일은 다섯 번을 넘겼다. 그쯤 되자 사소한 실수가 눈에 띄게 잦아졌다. 어제와 그제의 행사를 기억 못 하고, 오늘과 내일의 미팅을 헷갈리다 기어코 당장 중요한 업무까지 빵꾸를 냈다. 나는 결국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이때 처방받은 약이 바로 효과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내 몸에 어떤 위험부담도 주지 않고, 밤에는 잠이 잘 들고 중간에 안 깨면서도, 낮에는 또 활기찰 수 있는 약을 금방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내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이런저런 약들을 시도해 보며 20대 후반을 낭비했다.
유별나고 까다로운 몸 덕에 지난한 과정이었다. 약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한데 부작용은 예측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어떤 약은 복용 한 지 30분쯤 지나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고, 또 다른 약은 매번 가위에 눌리게 했다. 밤이 점점 무서워졌다. 내게 맞는 약을 찾지 못했음에도 더 이상 새로운 약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양약에 이어 한약 또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상담과 심리치료도 마찬가지였다. 신내림을 받아야 되나,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색도 해봤지만, 모태신앙에 기독교 가정을 둔 나에게 그 정도의 불효는 무리였다.
그때의 난 그렇게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느라 지쳐있었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아 무기력했다. 그저 그 상태로 꾸역꾸역 회사를 다닐 뿐이었다.
약을 조정하는 동안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하루 같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수면박탈이 누적돼 낮 내내 회사에서 헤롱 대다, 퇴근 시간이 되면 좀비같이 추적추적 집으로 향했다. 대충 저녁을 욱여넣고 여덟 시를 넘기면 슬슬 지난밤 복용한 약 기운이 드디어 떨어져 정신이 점차 또렷해지는데, 그래봐야 한 시간 남짓. 금방 또 저녁약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어김없이 월급 루팡이 되기 위해 다시 또 추적추적… 추적추적...
걱정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전 주 내게 남편과의 사적인 고민을 털어놨던 상사가 원래의 서늘한 눈빛으로 돌아왔던 때를 기억한다. 인사를 다시 안 받아줘 느꼈던 머쓱함과 동시에, 내가 무시당한걸 누가 들었을까 살폈던 창피함까지 생생하다. 나를 보며 옆팀 동기와 귓속말하다 뜻 모를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에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몸이 일순 얼어붙고 청소년기에나 느꼈을법한 소외감이 덮쳤다. 유치하고 미워 죽겠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해됐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참 꾸준하게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렇게나 걱정하던 친한 친구는 약속이 자꾸만 미뤄지자 지겹다는 듯 메시지를 보냈다.
“됐다 넌 뭐 맨날 아프대 ㅋㅋㅋㅋ”
멈칫했다. 뭐지? 내가 핑계 댄다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아니라면, 맨날 아픈 게 내 잘못인가? 우습게도, 비꼬는 듯한 그의 말투보다 가볍디 가벼운 “ㅋㅋㅋ“ 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자음을 통해 보란 듯 내비친 친구의 무신경함에 실망했다. 상사의 밉상짓은 친구 덕에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무언가 내 안에서 툭 끊기더니 와락 하고 무너졌다.
욕심 많던 20대의 나는 이제 없었다. 마냥 의기소침해져 '꿈은 과욕이고, 제발 피해만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쌓이고 쌓이다 폐를 끼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날 무렵, 나는 결국 휴직을 결심했다. 최대한 빨리 맞는 약부터 찾아 일상생활을 되찾아야 했다. 마음이 급했다. 일단 돌아가야 한다.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했다. 전과 같이 사랑받아야만 했다.
아무나 붙잡아 묻고 싶었다.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통잠, 아니 한 두 번만 깨는 밤은 대체 얼마나 단지. 잠을 푹 자고 난 뒤 맑은 정신으로 맞는 아침은 어떤 기분인지. 업무 할 때 머리는 또 얼만큼 빨리 돌아가는지. 정말 친구들과의 약속이 매번 신나고 기다려지는지. 그런데 어느 날, 특정 약과 커피 한잔에 잠시 이 모든 걸 엿봤다.
대충 맞는 약을 발견한 것이다. 약으로 해결하지 못 한 낮 동안의 피로는 커피를 마시자 금세 사라졌다. 그런 에너지, 각성, 즐거움.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긴긴밤이 끝난 것 같은 안도감에 휩싸였다. 공식은 그렇게 완성됐다.
< 특정 저녁약 + 아침 커피 한 잔 = 중간에 4-5번 깨는 수면 + 다음날 적당히 개운한 상태로의 일상생활 >
타협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공식에 쓰여있듯(‘4-5번 깨는,‘ ’적당히 개운한‘), 약의 효과가 완벽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쯤이면 훌륭했다. 오랜 시간, 약의 종류와 용량을 여러 차례 바꿔가며 시도해 본 끝에 겨우 만들어낸 최적의 조합이었다. 이만한 약 앞으로도 못 찾을 거라 확신했다. 그날 저녁, 나는 제일 친한 친구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곧이어 회사에 복귀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약을 복용했다. 처방해 준 의사 선생님도 딱히 관여하지 않아 편리했다. 매달 병원에 가 동일한 약을 복용하겠다고만 말만 하면 5분 만에 바로 약을 얻었다. 내성이니, 약의 안 좋은 성분이니 하는 건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종종 찝찝했지만 평안함이 훨씬 컸기에 대충 넘겼다.
완성된 공식 속 내 하루는 더 이상 뿌옇지 않고 쨍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시 차근차근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자존감도 이에 따라 슬며시 몸을 부풀렸다. 만족스러웠다. 나는 사람 다웠고 내 하루는 하루 다웠다. 그렇게 내 상태, 그리고 약 복용에 마냥 안주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아주, 아주 많이 흘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