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일본어
처음 일본어를 배운건 중학교 때였다. 교과 과정 중에 제2외국어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의 선택 과목은 일본어였다. 일주일 한 시간 남짓의 수업시간으로 많은 걸 배울 순 없었지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인사말을 배웠다.
고등학교에서도 일본어를 배웠지만 쉬운 회화 정도만 할 수 있었고, 한자를 쓰거나 외우는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그땐 형용사와 동사를 변형하거나, 일본어로 반말을 할 줄도 몰랐다. 입사 후 학원에 다닌 적은 있었지만 기초 문법을 배운 딱 한 달뿐이었다. 결국 중고등학교 때 배운 일본어로 근근이 살아갔다.
그래도 일본을 여행하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한자가 섞이면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읽고 쓸 수 있었다. 말이 유창하지는 않아도 서바이벌 일본어는 가능했고, 보다 정교한 소통이 필요할 땐 파파고를 켰다.
하지만 천하의 파파고도 먹히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간사이 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던 중 얇은 종이에 손을 베고 말았다. 연고와 밴드를 사러 공항 내 약국에 들어갔다.
어찌어찌해서 밴드는 찾았는데 우리나라의 마데카솔이나 후시딘에 해당하는 연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파파고에 ‘연고’를 입력해 약사로 추정되는 직원에게 보여줬다. 그러나 직원은 파파고가 출력한 그 단어는 일본어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연고를 풀어 설명할 일본어 실력은 없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궁리하다가 손의 상처와 밴드를 보여주며 바르는 시늉을 했더니 일본어로 ‘소독약’이라 말하며 연고를 꺼내 주셨다.
일본은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이긴 하지만, 종종 다른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단어가 조금 다르더라고 찰떡같이 알아듣고 알아서 연고를 권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약과 관계된 것은 정확하지 않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외국인도 아주 정확한 단어를 말해야 하는구나 애써 이해했다.
그러나 생명이나 건강 등과는 딱히 관계가 없는 곳에서도,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맞닥뜨리는 장벽이 곳곳에 존재했다.
히가시 우메다의 동쪽, 복잡하고 미로 같은 소네자키 골목에 엄청난 돈카츠 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구글 지도가 있어도 찾기 어려운 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종업원이 예약했냐고 물었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줄을 서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건 오산이었다. 점원은 예약을 안 하면 먹을 수 없다고 칼같이 거절했다.
허탕을 치고 우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친구와 다음날 저녁 먹을 시간을 의논했다. 다음날 저녁 7시에 그 돈카츠를 먹기로 했다.
유니폼을 사기 위해 들어갔던 축구용품 가게 카모 샵 탈의실 앞에 앉아 조심스레 돈카츠 집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7시, 2명’이라는 핵심 메시지만 전하면 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약자명이 문제였다. 직원은 내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 이름이 어려울 수 있겠다 싶어서 영어로 철자를 불러줬는데도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짧지 않은 통화 끝에, 나는 불완전한 이름으로 예약에 성공했다. 그래도 혹시나 이상한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내일 식사를 못하는 건 아닌가 조금 불안하긴 했다.
다행히 예약은 잘 돼 있었다. 전날 저녁과는 달리 이름과 예약시간을 얘기하니 가장 벽 쪽의 자리로 안내되었다. 최대 7-8석 정도의 작은 가게였다. 모든 좌석은 바 자리였다. 바 자리라고는 하지만, 주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소품과 메뉴에서 일본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고, 돈카츠 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돈카츠를 안주로 파는 주점이었다. 술의 종류는 사케와 정종, 생맥주부터 스파클링 와인, 카시스 우롱, 캄파리 소다 등의 심플한 칵테일까지 다양했다. 하쿠슈 위스키로 만드는 하이볼도 있었다. 샴페인을 잔술로 마실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먹은 히레카츠와 도로카츠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다. 검은 빵가루에 선홍빛 속살부터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줬다. 오징어 먹물이 들어가 까무잡잡한 (마치 돼지바의 가루를 닮은) 빵가루는 고소하면서도 바사삭 사그라들었고, 쫄깃한 식감은 찹쌀떡 같았다.
부드러운 질감은 히레카츠가 드라마틱했고, 항정살로 만든 도로카츠는 육질을 씹을 때마다 오도독하는 특이한 식감을 가졌다.
상상할 수 없었던 맛이라 오사카를 떠난 후에도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아마 다시 오사카에 가도 또 찾게 될 듯하다. 그 어떤 술보다도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이 잘 어울리는 식사(누군가에게는 안주)였다.
타쿠야는, 돈카츠가 이렇게 맛있음에도 방문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라 했다. 그 이유는 손님에게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접객이 불친절한 것은 아니지만, 정보에 불친절하다. 음식에 가격표가 없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돈카츠며 술의 가격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지 못한다. 샴페인의 경우는 주문하기 전에 물어봐서 한잔에 2,000엔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모든 걸 다 일일이 물어보기엔 눈치가 보여서 쉽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봐도 아무도 가격을 물어보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렇다 해도 체면을 차리느라 계산 직전에야 영수증을 확인하면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청구됐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싸긴 하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운 경험에 돈이 아깝진 않았다. 그러나 일본어를 전혀 할 수 없다면 돈이 충분하더라도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돈카츠가 나와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홍콩 혹은 싱가포르 사람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남자 한 명이 가게에 들어왔다.
전석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예약을 안 하면 식사를 할 수 없는데, 손님은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 방문한 것 같았다. 가게 측은 예약을 하면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렸지만 일본어였기 때문에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손님은 일본어를 몰랐고, 주인과 점원은 영어를 모르는 것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주인과 다른 손님 모두 이 상황을 외국인 손님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의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정말 이방인이었다.
그는 아직 예약 손님이 방문하지 않아 비어있던 자리에 앉았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낯선 곳의 손님은 생각했을 것이다. ‘왜 아무도 나에게 주문을 받지 않을까?’라고.
결국 그렇게 어색한 채로 20분이 흐른 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외국인 손님은 일본어와 영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의 통역 덕분에 이방인 손님은 모든 정황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통화가 끝난 후 영어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가 미안해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에게 굳이 잘못이 있다면, 일본어를 모른다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그가 앉은자리의 진짜 주인이 등장했을 것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손님은 영문도 모른 채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떠야만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나 남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나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히가시 우메다에서 돈카츠로 배불리 저녁식사를 마친 뒤, 기타신치역 근처의 한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좀 쉬다가 9시경에 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다소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친구가 도착하기 전까지 15분 정도 홀로 있었다. 바에는 손님이 꽤 있어서 바 자리에 두 자리 연석이 없었다. 내가 친구가 오기 때문에 두 명이 앉아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바텐더님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테이블 자리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오히려 오른쪽의 손님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한 칸씩 자리를 옮겨서 드디어 연석이 생겼다.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왼쪽 손님들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일본어를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타지에서는 눈치가 눈에 띄게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정점은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봤고, 한국이라고 했더니 옆의 여자가 동행에게 “봐봐, 내가 한국인이라 했잖아.”라고 했다. 그녀가 말끝에 붙인 “나루호도(なるほど/과연)”로 추측은 사실이 되었다.
다행히 조금 후에 친구가 도착했다. 나 홀로 이방인이었는데, 친구가 합류하니 지원군을 얻은듯한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친구가 왔다고 해도 변한 건 없었다. 이번엔 오른쪽에 앉은 손님들이 나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한국말을 따라 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대박!”이라고 감탄사를 말하면 옆에서 “대박”이라고 따라 하는 식이었다. 친구도 묘하게 기분이 언짢았다고 했다.
칵테일도, 기본 안주인 트러플 햄치즈 샌드위치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만큼 아주 맛있었지만 우리는 각 한 잔씩만 마시고 자리를 옮겼다. 외국어를 아예 못 알아듣는 것도 참 난감한 상황이지만, 어설프게 아는 상태에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나머지 퍼즐을 추측하는 것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영어가 통하는 외국인 친화적인 가게로 장소를 옮기면서 다짐했다. 이 어설픈 일본어 실력에서, 한자가 조금만 섞여도 글을 읽을 수 없는 일본어 문맹에서 탈출하겠다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망설임 없이 일본어 학원을 등록했다. 마침 회사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학원이 있었다. 월수금 수업이라, 아쉽게도 당분간 불금은 없다. 오직 학원만이 있을 뿐이다.
나중에 일본어를 듣고 말하는데 능숙해져서 이방인의 벽을 뚫고 보다 풍성한 여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느낄 수 있는 것도 좀 더 많아지겠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 또한 풍요로워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