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사랑의 매라고?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

by B급 인생

나는 일곱 살이 되던 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엔 초등학교를 그렇게 불렀다. 생일이 빠르기도 했지만, 엄마는 일 때문에 나를 돌볼 수 없어서 동갑내기보다 한 해 일찍 입학시켰다. 벌써 50년 전이니 그 시절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해져 간다. 그런데도 입학식 다음 날의 일은 유난히 생생하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은 없다. 요즘 세상엔 그런 일이 없겠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돌아와야 한다니 입학식 날부터 나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입학식 날 본 넓은 운동장과 미끄럼틀과 그네에 마음이 끌렸다. 외벽을 콜타르로 떡칠한 교사 건물은 꺼림칙했지만, 교실 안에 내 책상과 걸상이 생겨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길게 뻗은 복도가 맘에 들었다. 그땐 교실바닥과 복도에 마루를 깔았었다. 바닥은 양초로 칠하고 마른걸레로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고 미끄러웠다. 그러니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겨울철엔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개구쟁이들에겐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입학식 다음 날 나는 누나들을 따라 일찌감치 등교해 교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곧이어 두 아이가 떠들썩하게 들어오더니 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 둘은 두 살 터울의 형제였다. 동생은 그 해에 학령이 안됐지만, 형이 학교에 간다고 하자 늘 붙어 지내던 동생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썼던 모양이었다. 형제의 엄마가 학교 측에 간곡히 부탁하여 동생도 비공식적으로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형과 한참 조잘대던 동생 녀석이 ‘형아야, 미끄럼 놀이 가자.’하고 소리쳤다. 형제는 후다닥 복도로 뛰어나가더니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앉아있던 몇몇 아이들도 덩달아 합세하여 왁자지껄해졌다. 전날 미끌미끌한 복도에 마음이 동했던 나는 갈등이 생겼다. ‘학교에 가면 얌전히 있다가 와야 한다.’고 아침에 엄마가 한 말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그 말썽꾸러기 무리에 끼여 있었다. 우리는 긴 복도를 우르르 미끄러져 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온 교사가 시끌벅적하였다. 세상에 그렇게 신나는 놀이터가 없었다. 어느덧 1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우리는 교실로 들어가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웅성거리며 앉았다.


드르르 문이 열리면서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전날 입학식 때와는 달리 화가 많이 난 표정이었다. 모두들 철이 없었지만, 너 나할 것 없이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쯤은 감지할 수 있었다.


“아까 복도에서 미끄럼 놀이 한 놈들 다 나와!”

다들 왜 그러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뒷자리 동생 녀석이 소곤거렸다.


“형아야, 나가자.”

나는 이번에도 갈등했다. 나갈까 말까. 나가면 왠지 혼 날 것 같은데... 같이 놀던 아이 몇몇이 더 나갔지만 나는 숨죽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또 있을 텐데, 빨리 나왓!”

선생님이 자꾸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동생 녀석이 고자질할 것도 같았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때 머리에서 또 엄마의 말이 스쳤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단다.’ 나는 선생님 앞으로 쭈뼛쭈뼛 나가고 말았다.

형제 녀석들부터 엉덩이에 매를 맞았다. 제법 굵은 각목이었다. 매질 소리가 퍽퍽 났다. 동생 녀석은 맞으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내 귀에는 차례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커져가던 심장소리만 들렸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땐 나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드디어 내 엉덩이에도 불이 났다. 몇 번의 불기둥이 지나가기까지 무지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다. 엄마한테 매를 맞아본 적은 있었지만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절룩거리며 자리에 돌아와 걸상에 앉을 때는 불덩어리 위에 앉는 듯 뜨거웠다. 그래도 나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매질 후 한참이나 훈시말씀을 하셨다. 여러 사람이 생활하는 곳에서는 질서를 지켜야 한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복도에선 발끝으로 조용조용 걸어 다녀야 한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선생님 입의 움직임만 보였다. 내 머릿속엔 오직 ‘선생님은 무서운 사람이구나.’하는 생각만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학교는 얌전히 있다가 와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집에 와서 ‘오늘 뭘 배웠느냐’고 묻던 엄마에게 그 일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선생님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에게만이 아니었다. 어른 앞에서는 언제나 조용하고 복종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성인이 되어서도 순응적인 인간으로 살았다.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가급적 숨기고 살려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일은 모른 체하는 것이 내 삶의 기준이었다. 두 갈래 길에 섰을 때는 늘 조용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이런 성향은 나의 타고난 천성 때문만 아니라 그 날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내 삶을 조종했기 때문이지는 않았을까? 내 인성이 점차 형성되어가던 그때, 그 선생님이 매질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날 타일렀다면 나는 조금은 당돌하고 도전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문득,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던 김혜자 아줌마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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