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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Sep 02. 2021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데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누굴 만나 옛 시절의 영화와 무용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노인들을 자주 대한다. 살면서 겪은 다양한 체험에서 길어 올린 지혜 풍부하고 나름의  인생철학도 형성되었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다. 지 시절을 회상하며 무용담을 펼칠 땐 얼굴엔 자부심과 행복감이 가득다. '나 아직 안 죽었다'는 듯 목소리엔 힘이 잔뜩 들어가기도 한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기라도 하덮칠 듯한 기세로 언성을 더 높거나 불쑥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얼굴 구석진 곳늙어가는 자신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속절없음에 아쉬워하는 기색도 역력하다. 긴 수다가 슬슬 지겨워져 다른 화제로 슬며시 옮기고도 싶지만, 나도 좀 지나면 저럴 텐데 싶어 말 허리를 자를 수가 없다. 오히려 맞장구를 며 흥을 돋워 드리는 게 예의상으로나 분위기 상으로나 도리이다.


60대인 톡방의 선배들이 딱 이랬다. 일주일간을 망설이다 단톡방을 나왔다. 퇴사한 직장선배들과 수다를 떨던 방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각자의 직장이 있어서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 먹자고 장소와 시간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었던 방이었다. 누군가 한두 사람 더 초청하여 네댓 사람이 드나들었다. 가끔 식사를 하고 나서 '어제 잘 들어갔냐, 밥 잘 먹었다' 같은 가벼운 인사를 나눌 수 있어 그대로 두었던 방이었다.


그러다 알려주고 싶은 정보나 근황을 띄우는가 싶더니 점점 진한 농담과 함께 수다를 떠는 곳으로 발전했다. 심지어 정치성, 사회성 짙은 주제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나중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아재 개그를 위주로 장시간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런 톡질은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게 재미지만, 하고 나면 내가 뭘 했나 싶은 허탈감이 슬슬 들었다. 대놓고 심기가 불편한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때론 찜찜한 기분  적도 생겼.




톡을 하다 술 한잔 하자 누군가  제안하면  반색하며 날짜와 장소를 얼른 정하자고 재촉했다. 메신저를 통한 대화도 근황을 나누기엔 충분하지만 한잔 술을 곁들인 대면의 만남만 못하다. 접 얼굴을 맞대고 떠드는 수다는 묘한 얼굴 표정과 제스처, 생생한 목소리의 긴박감과 현장성이 있어 대화창의 이모티콘이 따라갈 수가 없다. 더구나 타자 속도가 느리고 오타 투성이인 연배들에겐 순발력 있는 대꾸의 쾌감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로 해야 제 맛이 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종종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대화는 형적으로 노땅 스타일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미래로 나가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는 게 보통이었다. 앞일은 도무지 화두로 올려지지 않았다. 살날보다  날이 더 많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지난번 만남에서 했던 얘기를 처음 꺼내 놓는 것처럼 다시 하기도 했다. 지난 대화는 까먹은 듯, 했던 얘길 만날 때마다 또 하고 또 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도 예전만 못해서 그러리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와중에 팩트가 틀린 내용을 맞다고 우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내가 바로 잡아주려 하면 모르는 소리 말라고 무안을 주었다. 간혹 나도 하고 싶은 말을 몇 마디 할라치면 중간에 말을 끊고 들어와 자신의 얘기를 이어가기 일쑤였다. 도무지 나는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내 존재는 안중에 없었다. 이러니 선배들의 질펀한 수다를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 만남에 흥미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카톡방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임은 늘 내가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다들 선배님이시니 가장 어린 내가 총무역할을 하는 게 당연고 속 편했다. 하지만 모임을 파할 무렵이곤혹스러웠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모임도 아니고 몇 명 모이지 않으니 따로 회비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먼저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얼마씩 걷어 충당한다는 건 어색했다. 주로 내가 분위기를 봐가며 모임을 주선했으니 내가 부담하는 자연스럽 여겼다. 만나자고 먼저 얘기하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게 일반적 관행인 연배들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한 번씩 돌아가며 식사비용을 부담하겠거니 기대한 내가 애당초 잘못이었다.


카운터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다들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기도 했지만 다음에 내가 사겠노라는 말로 아쉬움과 고마움을 표다. 어떤 때는 계산을 마치고 오는 나를 보며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혹시 계산한 거 아니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뻔히 알면서도 뒤늦게 보였던 계산된 리액션이었다. 마치 이번엔 자신이 부담하려 했는데 내가 무례했다는 듯이. 하지만 모임이 반복될수록 그런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신이 한번 사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선배 그 말을 잊은 듯 다음 모임에서 일어설 생각이 거의 없어 보이 했다. 처음 두어 번은 모처럼 선배님을 모시고 내가 한턱냈다는 마음에 뿌듯했다. 하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몹시 서운했다. 물론 내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가운데 단톡방은 지속되었고 실없는 농담과 아재 개그도 여전했다. 나는 소주 한잔하자는 선배의 제안이 나올까 봐 늘 조마조마하는 마음이 생겼다. 금전적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내 존재가치가 이런 정도밖에 안되나 싶었다. 선배들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돌아가며 밥 한번 사는 게 어려운 형편도 아니다. 나름대로 용돈 벌이는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내가 쪼잔해 보일 수 있지만 꽤 서운했다. 나이가 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 바라진 않는다. 지갑만 열어도 좋겠다. 아니면 말씀이라도 좀 적게 하시던지.




단톡방을 나오면서 오해를 살까 봐 적당히 핑계를 대었다. 핸드폰을 바꾸느라 당분간 대화방에 참여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아무리 첨단 기기에 무딘 연배라고는 하지만 핸드폰을 바꾼다고 그때까지 하던 톡질을 못한다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그 뜻을 전하고 나서 일주일을 망설였다. 그러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나가기 아이콘을 눌렀다. 이미 눈치를 챘을 선배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다시 그 선배들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선배들도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러고 나니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선배들에게 결례를 한 내 처신 때문이 아니다. 나는 지금 선배들의 흉을 보고 있지만, 나도 선배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지 걱정이다. 혹여 후배들이 내 앞에서 내색은 못하고 날 그렇게 여긴다 참 민망한 일이다.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나 역시 후배들을 만나면 듣기보다는 내 경험과 생각을 말하기 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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