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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Sep 20. 2023

*할아버지팽나무의 큰기침

    시가 있는 풍경(106)


*할아버지팽나무의 큰기침  

                                         전재복




시방은 허허벌판 하제뜰

질긴 목숨 잡초만

쉰 목소리로 망향가를 부른다만


삼천여 가솔들이

들며 나며 왁자한 날도 있었느니

황톳물 바다를 얼싸안고

지지고 볶으며 삶을 캐고

논배미 밭두렁 바지런히 일구던 시절

하늘을 우러러 안부를 묻고

땅에 엎드려 올곧게 답장을 쓰던

우리 땅 우리의 시절이었네


조선왕조 500년을 딛고

왜놈에 짓밟힌 치욕의 세월을 넘어

해방이라 만세를 불렀었네


빼앗긴 들에 봄이 온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내 마당을 내노라더니

내 식구 내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깡그리 쫓아내고 쇠울타리를 둘러쳤네


다 떠나도 나는 못 가리

600살 쇠고집으로 뿌리를 지켰네만

허허 우리 동네 땅 주인이 미쿡이라니

언제 우리가 꼬부랑 국적을 달랬던가


장죽 담뱃대로 대청마루 땅땅 두드리며

팽나무 어르신 큰기침 한 번 하셔야겠다

여기는 내 땅이여

내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단 말여

쩌렁쩌렁 호통 한 번 치셔야겠다


#2023 신무군산문학상 본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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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져 버린 군산 하제마을, 폐허로 인적 끊긴 그곳엔 소금기 먹은 바람이 애먼 갈대만 틀어쥐고 흔들어 댄다.

사람의 흔적이 끊겨 불모의 땅처럼 보이지만 이곳도 한때는 주민 3천여 명이 어업과 농업을 생업으로 북적이며 살았던 곳이다.


마을 어귀에 심어진 600살 팽나무는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주민들이 신성시하며 지켜온 역사적 민속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나무이다.

옛적 우리 선조들은 하늘과 땅을 경배하며 자연물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자연을 아끼고 자연에 순응하며 착하게 살았다.


하제 팽나무는 조선왕조 500년을 사람들과 살았고, 흉악한 도적 일제의 수탈현장을 피눈물로 지켜보았고, 광복의 기쁨도 함께 누렸다.


그러던 것이 미군기지가 군산에 들어오고, 마을은 시나브로 사라져 버렸다.

집안 단속 잘못하고, 힘을 키우지 못한 무능한 주인 탓임에 어쩌랴!


사람이 떠난 폐허의 땅에 600살 노거수임에도 불구하고 좌우로 균형 있게 퍼진 수려한 모습을 지닌 할아버지 팽나무는 아직 건재하다.


마을은 없어졌지만 다행히 이 팽나무는 2004년 12월 10일 전라북도 기념물(보호수)로 지정을 받아 살아남았다.

오늘도 코 앞에 둘러친 철책 너머 한국 속의 캘리포니아를 비통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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