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비전재복 Oct 20. 2023

* 맑은 詩  다시 읽기

  아름다운 동행(109)

*이소암의  맑은 詩 다시 읽기




어느 소식 있었는가


어느 밤에 오셨는가


인적 없는 산길


청매靑梅 곁 맴돌며 물을 때


나비 기다려 매화 피랴.


나뭇가지 박차며 날아가는


새의 말


             -<새의 말 전문>-

***





부표浮漂 위


입적入寂한 스님처럼


꿈쩍없는 새


내생來生이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바람으로나 올까


부질없다 부질없다


호수 벤치로 몰려드는 물결


이름 모를 새와의 간극間隙을 지운다


그대까지 지운다


                      -<무無 전문>-

***





붉은 무덤 피었다


나를 사랑한 죄로


너를 보내고 돌아온 그 길이다


두 무릎 꿇는다


술은 따르지 않겠다, 차라리


각황전 부처님 앞에 엎디어


나를 울겠다


나조차 잊는다면, 너를 잊는 것도 순간이겠다


      -<고약한 사랑 -화엄사 홍매 전문>-



 

가을을 깊이 발효시키느라 빗소리가 10월의 밤을 절단내고  있었지요.

어제는 정도를 살짝 넘친 고단한 하루 분량의 피로였으나 잠은 쉬 돌아오지 않았구요.


다소 부산한 아침을 물리고, 어제 오후에 식구 중 누군가 들여놓았을 시집 두 권을 꺼내 들었네요.

그중 한 권 내심 기다리고 있던 시집이었습니다.


<나비 기다려 매화 피랴>

이소암시인의 선시를 읽으려면 자세부터 단정히 해야 될 것 같아, 고매한 큰스님 앞에 나아가듯 마음깃을 여미게 됩니다.


천년도량을 감도는 향을 사르는 냄새,

여명에 눈 뜨는 맑고 그윽한 산의 瑞氣,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빛을 띤 새의 날개 짓,

범접할 수 없는 고매한 선승의 뒷모습...


그녀의 시는 그렇게 나를 무릎 꿇립니다.

덜어 낼 것 다 덜어내서 너무 마알간,

그러나 전혀 가볍지 않은 사유의 깊이를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같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데 누구는 늘 허방을 짚고 비틀거리고, 그녀는 詩속에서 仙界를 쉬엄쉬엄 걷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일 겁니다.


쉽사리 입 밖에 내놓지 않는 시인의 고독을 詩속에서 슬쩍 훔쳐보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늘 건필하시기를, 더욱 사랑받으시길!

          (20231020 옥정리에서)

작가의 이전글 *클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