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228)
능소화 / 전재복
풀숲에 그냥 두고 지나가시지
초동의 풀피리에 눈 맞추다
별 같은 아이 두엇
씨앗처럼 품어 기르며
날마다 욕심 없이
배시시 꽃 필 텐데
하룻밤 보자시고 우듬지 꺾어
만 년 얼음병에 어여삐 꽂아두니
꽃신이 있어도 걸을 수 없었네
슬픈 전설
잎새로 무성한 채
그리움 첩첩이 접어
붉게 매달고
오늘도
까치발로 담 밖을 넘보는
애처로운 몸짓
#개밥바라기별, 전재복 제5시집 수록작. 2020. 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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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는 바람처럼 하룻밤 정을 준 임금은 두 번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
행여나 행여나 발길을 끊어버린 임을 기다리며 날마다 담 밖을 기웃거리고 애를 태우던 궁녀 소화는 결국 애처로이 죽었더란다.
그 궁녀를 묻은 무덤가에서 곱고 기품 있는 붉은 꽃이 피었으니, 그 꽃을 소화의 꽃 '능소화'라 불렀다고 한다.
여름 한철 그리고 가을까지 다른 나무에 의지해 주황색 밝은 꽃등을 하염없이 피워 올리는 꽃!
피는 모습이 요란하거나 헤프지 않고 기품이 있어서, 양반가에서 또는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성도 있어, 스스로 정절을 지키려는 옛 여인의 호신용 은장도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얹어본다.
(꽃말 : 여성, 명예, 이름을 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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