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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Dec 16. 2024

유모구하기

산후조리원에서 생긴 일

뒤로 질끈 동여맸지만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J 산모의 얼굴은 몹시 수척해 보였다. 언제나 그녀는 그런 얼굴로 실내화를 직직 끌며 잠결인 듯 꿈결인 듯 흔들거리며 걸었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인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나비가 날듯이 나풀나풀 걸어오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어김없이 유축한 모유로 가득 찬 젖병을 들고서.

모유수유하기가 버겁다고 투정을 하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산모였다. 젖병을 받아 들며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대책 없이 사고만 치는 말괄량이 삐삐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유모 구하기 프로젝트. 어때요?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 아닌가요?”
  

대부분 산후조리원은 모유수유를 원칙으로 한다. 물론 모유가 생성되지 않았거나 모자랄 경우 당연히 분유를 먹인다. 산모들은 모유수유에 관심이 아주 많다. 내가 근무하는 조리원에도 국제 모유수유 전문가를 초빙해서 매주 1회 모유수유의 장점을 강의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 시간이 되면 산모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메모지와 펜을 들고 마치 대학입시 설명회에 참석한 엄마들처럼 자리에 꼿꼿이 앉아 공부에 전념한다.    
  

체력이 안 되면 모유를 끊고 분유를 먹이지 그러냐는 나의 권유에 그녀는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모유가 얼마나 좋은데요. 단백질을 비롯해 아기에게 좋다고 하는 건 모두 다 들어있는걸요. 유방암이나 난소암 예방도 되구요. 무엇보다 좋은 건 다이어트가 된다는 사실이죠.” 모유수유 강의를 제대로 들은 듯 그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힘이 흘러넘쳤다. 기특한 마음에 그럼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수유를 계속하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단박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좋은데 너무 힘이 든단 말이에요. 일단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젖몸살 때문에 아파서 잘 수가 없더니 이제는 젖이 불어서 새벽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자다가 일어나서 유축기로 젖을 짜다 보면 내가 젖소가 된 것 같다니까요. 잠을 설쳤으니 늘 피곤하구요. 두세 시간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게 되면 앞으로는 외출도 마음대로 못 할 거 아녜요?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제 새벽 유축할 때는 제 젖가슴을 확, 떼어내 자는 남편 가슴팍에 떡, 붙여주고 싶던걸요. 그리고 배는 왜 그리 고픈지 밥 세끼에다 간식에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 그런데 수유하는 동안 먹지 말라는 것들은 모두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에요. 치킨, 커피, 매운 닭발, 컵라면…. 이런 것들이요. 이러니 제가 어떻게 유모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구요?” 

유모 구하기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은 것일까. 전과 다르게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목소리도 통통 볼처럼 튀어 올랐다. 예전 어머니들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제 새끼 젖 먹이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렵냐며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누울 일이라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법한 상황이었지만 배를 움켜잡고 우리 둘은 까르르 웃었다. 웃음 끝에 구하는 유모의 조건이 도대체 무어냐고 물어봤다. 

“요즘은 여자들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거기에다 도시는 공해가 너무 심해요. 스트레스와 공해에 찌든 여자 가슴에서는 좋은 모유가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어쩌면 제 가슴 속에 있는 모유도 별로 좋지 않을지 몰라요. 그래서 유모는 가급적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산골 여자라면 좋겠어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은 여자로 쏘맥 대신 산소와 이슬을 섞어 마시고, 가자미 눈 부장님 흉을 씹어대는 대신 산 더덕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 먹고, 공해에 찌든 먼지 대신 피톤치드만 마신 여자요.” 알 거 다 알면서 엄살을 피우는, 묻는 말에 살살 웃어가며 재치 있게 대꾸도 잘하는 그녀가 아주 당차 보였다. 그러면서도 모유수유가 오죽 힘들면 유모 구하기를 생각했을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는 생각에 또 한편으로는 얄밉기도 했다.  
 

문헌을 보면 조선 시대 왕실에는 유모가 있었다. 유모로는 주로 사대부 집안 아녀자를 원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기를 길러야 했으므로 실제로는 주로 공노비 중에서 골랐다고 한다. 대비나 대왕대비가 심사 위원이 되어 선정했다고 하니 중전마마 간택만큼이나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신체적 기준을 보자면 우선 건강해야 하며 젖을 짜보면 진한 흰색이 나와야 하고 술은 당연히 금물이었다. 신체적인 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도 조건이 있었다.

『순조실록』을 보면 유모로는 반드시 너그럽고 인자하며 따뜻하고 공손하며 예의를 차리고 말을 적게 하는 이를 골랐다고 한다. 또 반드시 외모가 단정하고 품행과 행실이 양순한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천한 신분의 유모가 먹이고 안아주고 길러낸 왕자가 왕으로 등극하게 되면 그 유모는 봉보부인이라는 종일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받기도 했단다.     
  

요즘 세상에 유모일을 생업으로 하는 여자는 없을 테니  J 산모가 진짜로 유모를 구하는 건 아닐 것이다. 모유수유의 힘겨움을 그녀 방식대로 표현했다고 여겨졌다. 그래도 혹시 철철 흘러넘치는 모유를 두고 분유로 갈아타면 어쩔까 싶어 이런 훈수를 덧붙였다. 

“성분 좋은 모유를 주는 것만으로 모유수유의 장점이 모두 활성화되는 건 아니에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보듬어 주는 사이에 아기의 두뇌가 발달되는 것은 물론이고 인성까지 올바르게 형성된다고 하네요. 왕실에서 유모에게 후한 대접을 하고 높은 벼슬을 준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아기를 안고 모유를 먹이는 동안 모체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애착 호르몬이 분비되죠. 그래서 옛날 씨받이들도 젖을 물린 아기는 쉬이 내주지 못하였다는군요. 유모한테서 분비되는 애착 호르몬으로 인해 우리 아기가 산골 유모를 진짜 엄마로 착각하면 어쩌죠?”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 방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여기가 짜르르 아파와요.”라며 두 팔로 가슴을 감싸 안은 채 웃어대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며 당당히 퇴실했다. 아기를 꼭 끌어안고 조리원 문을 빠져나가는 그녀에게서 장미꽃 같은 여자의 향기 대신, 의젓한 어미 새의 비릿한 젖 냄새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봉그르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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