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은 날카로운 갈대를 사용해 추상적인 기호를 점토판에 새겼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글자인 쐐기문자로 발전합니다.
알다시피 말이란 것은 입을 통해 발화되어 귀로 전달되고 나면 즉시 사라집니다. 그러나 글자는 ‘쓰다’ 혹은 ‘새기다’라는 서술어와 함께 쓰이고, 기록되어 읽히는 방법으로 보존되지요. 그런 까닭에 문자는 지금 여기의 상황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까지도 전달됩니다.
인간에게 과연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억을 잡아두는 일이 아닐까요. 멀게는 출생 이후 아슴푸레한 어느 순간부터 가깝게는 방금 창틀을 넘어온 삽상한 바람 냄새까지, 그것들을 지면에 꾹꾹 눌러 저장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왜 글자를 알고 싶어 하고 쓰고 싶어 할까요? 고대 유물 속 글자는 단순한 기호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격과 조사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 후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인간은 서명할 줄 알게 됩니다. 비로소 글자에 ‘나’라는 자아를 담게 된 것입니다. 고대 오리엔트 왕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신전 벽돌에 이름을 새겨놓았습니다. 다시 장구한 시간이 지난 현재에 서명은 일반화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저세상으로 건너가기 전에 내가 이 세상에 왔었노라는 존재의 흔적을 비로소 남깁니다. 부스러기 같은 내 기억을 붙잡아 모으고 추려 지면에 새기고, 드디어 서명한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라는 책 한 권을 손에 듭니다.
유년의 오월은 온통 연둣빛이었습니다. 물통을 옆으로 메고 봄 소풍을 갔었지요. 연두 사이에 조팝나무 꽃과 아까시나무 꽃이 점점이 피어나던 계절이었습니다. 봄볕에 그을린 빨간 얼굴로 들꽃 몇 송이를 꺾어 들고 소풍에서 돌아왔습니다. 빈 사이다 병에 꽂아둔 꽃들이 시들 때면 까닭 없이 슬퍼지기도 했지만, 길어진 햇살만큼 저의 꿈도 한 뼘 더 커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화한 박하 향 나는 연둣빛 계절을 좋아합니다.
지도해 주신 임헌영 스승님과 문우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한국산문」 출판부에 감사 인사 올립니다. 제가 글을 읽고 쓰는 동안 조금 외로웠을지 모를 남편, 칠복 최경우 님과 사랑하는 딸 지연, 애정하는 아들 준현에게는 색깔 다른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의 계절이 언제나 오월이기를 바랍니다.
2023년 10월에 박은실
이 글은『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의 서문입니다. 저는 연두색을 좋아합니다.
물론 연둣빛 오월도 사랑하지요. 그래서 제목도 이렇게 지은 거거든요.
책을 펴낸다는 것이 책임이 주어지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누군가는 어쭙잖은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밑줄을 그어가면 정독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 출간이다 보니 서툴고 부족했습니다. 하여 다소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툴고 모자란 제 생각이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