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온 특사입니다. 속히 신혈소군을 모시고 환궁해야 합니다. 소군을 이곳에 두면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수하들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대사는 속히 소군을 데려오시오.”
백가가 진관에게 눈알을 부라렸으나 진관은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그들도 기골이 장대한 진관을 어찌하지 못했다. 진관이 무예에도 능하고 도술까지 부린다고 소문이 난 터였다.
‘이 자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 천추태후나 김치양 일파가 보낸 자객이 분명하다. 어제 왔던 황보유의가 진짜 황제의 특사가 맞는 것 같은데 내가 황보유의를 너무 의심한 것 같다.’
진관은 두 사내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진관의 눈씨가 얼마나 강하고 매서운지 두 사내는 진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들이 대량원군을 발견했다면 즉시 죽이고 진관도 죽이려 했을 것이다.
“원군께서는 겨울 사냥을 좋아하시어 새벽에 암자를 떠나셨습니다. 오늘은 못 돌아오실 겁니다. 한번 사냥을 나가시면 이삼일 또는 사나흘 뒤에 돌아오시는 때도 있습니다. 두 분 특사님들의 성함과 직분이 어찌 되시는지요? 소승이 원군께서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관이 마음 급한 두 자객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우, 우리는 황제의 친위군인 이군의 응양군(鷹揚軍) 소속 낭장 백종과 천수라 하오. 그런데 스님이 된 소군이 어찌 살생을 한단 말이오?”
백가가 말을 더듬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진관이 아무리 산속에서 도를 닦는 수도승이라도 고려 중앙군인 이군 육위의 체제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진관은 백가와 천가가 머리가 길고 일반인 복장을 한 것으로 미루어 중앙군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어제 신혈암을 찾았던 황보유의는 관복을 입고 있었고 함께 온 군관들도 단정한 군복 차림이었다. 백가와 천가는 한나절 암자에 하릴없이 머물다가 돌아가야 했다. 김치양은 두 자객을 보내면서 대량원군을 보면 즉시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자들은 김치양이 보낸 자객이 분명합니다. 나는 백종과 천수라는 자들을 알지 못합니다. 응양군은 머리를 길게 기르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의 특사라면 절대로 두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나를 데리고 황궁으로 가려고 했다면 호위 군사들과 함께 와야 합니다. 아무래도 어제 왔던 황보유의가 황제가 파견한 특사가 맞는 듯합니다.”
대량원군은 황보유의를 독대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아쉬웠다.
“소승도 지나고 보니 원군 말대로 황보유의가 황제 폐하의 특사가 맞는 듯합니다. 아마도 오늘내일 중으로 황보 판관께서 다시 올 것입니다.”
대량원군과 진관은 자신들이 너무 의심이 많아 황제의 진짜 특사를 그냥 돌려보낸 게 아닌가. 후회하였다. 진관은 시시각각 조여 오는 김치양 일파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대량원군이 속히 황제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황제가 대량원군을 끼고 있으면 아무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건강이 날로 악화하고 있는 황제가 갑자기 대량원군에게 양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가 붕어하면 천추태후가 황제의 생모라는 점을 내세워 자기 아들을 황제로 내세울 수도 있는 엄중한 상황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진관의 말대로 황보유의가 이틀 전에 왔던 그대로 군사들을 대동하고 다시 신혈암으로 찾아왔다.
“대사님, 황제 폐하의 환우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대량원군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밀지를 보십시오, 여기 황제 폐하의 수결(手決)이 선명하지 않습니까? 한시가 급합니다. 다른 악의 세력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속히 대량원군을 황궁으로 모시고 가야 합니다. 고려의 사직이 걸린 문제입니다. 잘못하면 역신 김치양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황제 폐하를 비롯하여 대량원군과 우리는 모두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진관은 황보유의의 간곡하고 진실성 있는 언행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때를 놓치면 왕씨의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선휘판관께서는 소승에게 귀 좀 빌려주십시오.”
진관은 도박하기로 했다. 그는 황보유의에게 귓속말로 잠시 속닥거렸다. 황보유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웃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