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낭장, 지금 즉시 이성언과 고적 군관 그리고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 신혈암에서 두 마장(馬杖)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시오. 내가 곧 기별을 넣으리다.”
문연과 이성언 등은 황보유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세 군관은 황보유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문연 일행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혈암을 빠져나갔다. 군사들이 암자에서 모두 빠져나가자 진관은 경보에게 황제의 밀지를 주며 눈짓하였다.
“판관께서는 소승과 요사채에서 차나 한 잔하시지요.”
두 사람이 요사채로 들자 경보는 주변을 살피고 나서 법당 안으로 들었다. 수미단 뒤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울릴 때마다 대량원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제오늘 날씨가 참으로 화창합니다.”
“개경도 여기처럼 날씨가 화창할 테죠?”
요사채에 든 진관이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달이며 덕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차를 달이면서도 진관은 황보 유의를 유심히 살폈다.
“도순검사께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간계에 속으셨습니다. 즉시 군사를 돌려 서경으로 가십시오. 황제의 명령 없이 군사를 출동시키면 역모죄에 해당합니다.”
내사주서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 장서기 최창회(崔昌會)가 개경을 향해 진군하는 강조를 찾아와 개경의 소식을 전했다.
‘황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김은을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 그런데 강조가 외방에서 대군을 장악하고 있어 혹시 반역을 도모할까 염려하고 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는 강조를 제거하기 위해 밀서를 날조하여 개경으로 부른 것이다. 지금 개경으로 가면 죽는다.’
강조는 남행을 잠시 멈추고 심복을 풀어 개경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김치양 일파가 이미 황제를 시해하고 도순검사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기 위해 황명을 사칭했습니다.’
강조는 심복들의 보고를 받고 서경으로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위종정과 최창회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강조를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부러 거짓 정보를 전한 것이었고, 강조의 부하들은 개경 저잣거리에서 흘러 다니는 소문을 강조에게 보고했다. 실제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황제의 명을 받고 개경으로 달려오고 있는 강조를 제거하기 위해 절령(岊嶺)에 군사를 배치했었다. 그러나 강조가 서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천추태후는 마음을 놓았다.
[황제가 이미 죽고 없으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 일당을 처단하고 사직을 평안케 하라.]
강조의 아버지가 가노(家奴) 편에 강조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강조는 다시 군사 오천 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그런데 강조가 평주(平州)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조는 아버지의 말만 믿고 군사를 움직인 것을 후회하였다.
강조의 아버지도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사실로 믿고 아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황제의 명령 없이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달려온다는 것은 반역을 도모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강조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도순검사,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우리는 역모죄를 지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곧장 개경으로 진군하시지요. 개경으로 달려가 이참에 황제를 바꿔버리시지요?”
부사인 이부낭중 이현운(李鉉雲)이 강조의 역심을 건드렸다. 이현운은 강조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서경으로 철군해도 나는 역모죄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 좋다. 현운이 말대로 개경으로 곧장 달려가 조정을 뒤엎어버리자. 그리고 현재의 황제를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황제에 앉혀야 내가 살 수 있다. 황제가 보위에 앉아있는 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제거할 수 없다. 황제만 폐위하면 만사가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