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는 개경 인근에 도착하여 전령을 은밀히 황제에게 보냈다. 전령에게는 강조가 보내는 서신이 들려 있었다. 동시에 강조는 신혈사에 감찰어사 김응인(金應仁)과 군사를 보내 대량원군을 개경 궁성으로 모셔 오게 했다.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짐이 병석에 눕자 간악한 무리가 황위를 넘겨다보고 있다. 이는 짐이 미리 후사를 결정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량원군은 태조 왕건 할아버님의 적손이니 속히 황궁으로 오도록 하라. 짐이 죽기 전에 그대에게 고려의 종묘사직을 맡기고자 한다. 만약 짐의 수명이 더 연장된다면 대량원군을 다음 후계자로 정하여 만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노라.]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나이다.”
경보에게 황제의 밀지를 전해 받은 대량원군은 감읍하여 북서쪽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온 감우(甘雨)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대량원군은 황제의 밀지를 받아 들고 황제의 수결까지 확인하였다. 틀림없는 황제의 수결이었다. 격정을 추스른 대량원군은 경보의 안내로 법당을 나와 요사채로 향하려 했다. 속히 황보 유의를 만나 황제의 의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와 만사를 상의하고자 했다.
“곧 대량원군께서 이리로 드실 겁니다.”
차를 들던 진관이 황보 유의에 넌지시 말했다.
“대량원군께서 이 암자에 계셨던 것입니까?”
“원군께서는 잠시도 신혈암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법당 가운데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 아래에 굴을 파고 그곳에 원군을 은거하게 했습니다.”
진관의 말에 황보 유의는 무릎을 쳤다.
“과연, 대사이십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고 김상궁 편에 독이 든 다과를 보내기도 했다는데, 그 모든 고비를 대사께서 현명하게 대처하셨습니다.”
그제야,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황보 유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법당으로 향했다. 진관과 황보 유의가 법당에 막 들어가려 할 때 문이 열리면서 대량원군과 마주쳤다.
“선휘판관 황보 유의가 대량원군께 문후 올립니다.”
“그제 판관께서 오셨을 때 만났어야 했는데, 내가 미련하여 재차 방문하게 했습니다.”
대량원군이 환하게 웃으며 황보 유의를 맞았다.
“아닙니다. 이런 수고는 수백 번 해도 상관없습니다. 원군께서 무사하시니, 감개무량입니다. 어서, 법당 안으로 드시지요.”
황제가 이미 대량원군에게 양위할 예정이라고 한 바가 있고, 언제 병약한 황제가 붕어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량원군은 이미 반은 황제나 다름없었다. 법당 안에 든 황보 유의는 대량원군에게 절을 하고 그간의 황궁 사정을 아뢰었다. 조금 전까지도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법당 안은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스님, 법당 앞마당에 처음 보는 군사 백여 명이 늘어서 있습니다. 어서 나가보시지요.”
세 사람이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중에 경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소리쳤다. 대량원군과 황보 유의는 처음 보는 군사라는 말에 순간 낯빛이 하얗게 변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승이 나가보겠습니다. 원군께서는 수미단 아래로 피하시고, 판관께서는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진관이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에 군관 한 명을 데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그대는 감찰어사가 아니오?”
“선휘판관께서는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황보 유의와 김응인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김응인에게 현재의 정세를 전해 들은 황보 유의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김응인 역시 강조의 명령으로 대량원군을 모시러 왔다는 말에 진관과 황보 유의는 안심했다. 수미단 밑에 급히 몸을 피했던 대량원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