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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Feb 16. 2022

"그곳에서도 행복하시길 바래요"

레인맨이며 말아톤이기도 한...

첫 발령지에 '레인맨' 같은 학생이 있었다.(이후 글에는 '레인'이라고 부르겠다.) 자폐증세가 있는 학생이었고 영화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숫자를 잘 기억하는 친구였다.


그 학생이 선생님들의 자동차 번호판을 다 알고 있다는 게 화제가 되고 있었고, 교무실에 여러 선생님들이 모였을 때 궁금증을 해결할 기회가 왔다.


담임선생님이 먼저 물었다.


"레인아, 여기 이 선생님 차 번호 아니?"

"네, 선생님 차는 아반떼 1234예요."

"(다른 선생님을 가리키며) 이 선생님은?"

"네, 이 선생님은 아반떼 4567이었는데 이번에 소렌토 8901로 바꾸셨어요."

"우와~!"


교무실은 당시 방송에서 새롭게 언급되던 서번트 신드롬 등을 언급하며 신기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몇몇 선생님 자동차 번호판을 연달아 맞춘 후 장난기 많은 선생님이 날 가리키며,


"레인아, 이 선생님은?" 하고 묻자.


잠시의 지체함도 없이...


"이 선생님은 차 없어요!"


교무실엔 한바탕 폭소가 일었다.

나도 함께 웃었으나 약간 슬펐다.

젊은 나이에 차가 없다는 게 부끄럽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약간 뭐랄까....ㅎㅎㅎ


세월이 흘러 그 친구도 졸업을 했고 나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담임을 했던 학생도 아니라서 자연스레 기억 한편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 7, 8년 전쯤이었을까 지하철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일행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는데 어느 청년 하나가 내 눈앞으로 갑자기 다가와,


"수첩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계셨죠?"라고 말했다.잠시 놀랐지만 다행히 그 학생의 이름이 금방 떠올랐다.


"이야~! 이게 누구야 레인이구나!"

"네 선생님. 잘 지내셨죠? 저는 지금 OO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래? 야 참 반갑다. 너도 잘 지내지?"

"네 선생님 저도 잘 지내요. 그럼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무표정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와 높낮이가 없는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분명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고 나도 참 반가웠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 그 친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렸고 나는 동행하던 선생님께 그 친구를 간단히 소개하며 위의 자동차 번호판 이야기를 하며 함께 또 웃었다.


그리고 며칠 전...


5년 동안 지내던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이임인사를 하기 위해 들렀다. 행정실 주무관님과 업무 관련 정리를 하려고 통화하던 중,


"아참 선생님, 제자 중에 레인이라는 학생이 전화했었어요."


흔한 이름이었기에 최근에 졸업한 학생 중에도 동명이인이 있어 그 학생이겠거니 했다. 전화번호를 전해 받고 전화를 걸었다. 상당히 오래 신호가 갔지만 연결이 안 되었다. 일단 전화를 끊고 다른 일을 하려는 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레인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첫 문장에 바로 그 학생인 걸 알 수 있었다.


"이야~ 레인아 반갑다. 잘 지내?"

"네 선생님. 저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일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니 그러고 보니 우리 지하철에서 만난 적도 있었지?"

"네 맞아요."

"선생님! 근데 이번에 어느 학교로 옮기시나요?"


이 부분에서는 좀 놀랬다. 내가 옮기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응. A고등학교로 가게 되었어."

"아네. 그렇군요."


반가움과 놀라움 속에 오래전 같이 일하던 선생님들 이야기를 나눴고 여전한 기억력으로 나도 모르는 선생님들의 근황을 말해 주었다. 통화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레인아 이렇게 연락 주니 너무 반갑고 고맙다. 잘 지내길 바란다."


"네 선생님. A고에서도 행복하게 사시길 바랄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 주위 선생님들에게 이런 일이 있다며 이야기를 했다. 다들 근무 마지막 날에 이런 통화를 하게 된 것을 신기해하기도 하고 재밌어하기도 했다.


집에 와 생각해보니 그 친구의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행복해라"라는 단어를 음성언어로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고, 높낮이도 장단도 없는 그 말에서 진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많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좋은 것만 기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학생에 머릿속에 있는 많은 기억 중 내가 좋은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그 학생이 내게 글을 써서라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인 것처럼.


그 학생의 응원으로 새 학교에서의 생활이 행복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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