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복숭아 청 만드는 게 어때서
군대의 억압을 이용해 게으름 부리지 않기
살면서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복숭아 청을 군대에서 만들었다. 그것도 큰 병으로 두 통이나.
친한 후임 S의 꼬임에 넘어간 결과였다. 요리에 언제나 진심인 S는 김치말이 국수를 해 먹기 위해 군대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소면을 삶는 법을 터득했다. 전자레인지로 소면을 달라붙지 않게끔 익히기 위해서는 넓고 얕은 용기를 써야 한다나. 한 번은 군대 식당에서 달달한 복숭아가 간식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S가 말하길,
"이걸로 복숭아 청 만들어 먹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얘가 밥 먹다 말고 뭔 소리를 하나 싶었다.
"엄청 다니까 맛있긴 하겠네. 근데 왜?"
내 대답을 듣자마자 S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식당에서 일하는 병사에게 가서 영문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복숭아 스무 개 남짓을 양 팔에 가득 안아서 자리에 가져왔다. 도대체 식당 병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순조롭게 가져온 걸 보니 아무래도 남은 복숭아를 가져온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S는 복숭아 청을 만든다는 말을 농담으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는 정말 군대에서 복숭아 청을 만들 작정이었다. 심지어 내게 같이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재밌을 것 같아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바로 이 부분에서 나도 참 S 못지않게 별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품을 함께 생각했다. 또, 복숭아 청을 만드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군대에 와서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요리의 즐거움을 만끽할 생각에 잔뜩 설렜던 것 같다. 복숭아를 썰어서 그 위에 설탕을 쌓는 작업을 반복할 뿐이겠지만, 식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두 사람의 대화는 군대에서 했던 어느 대화보다 활기찼다.
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BX(공군 부대에서 운영하는 마트)에서 구한 물건으로 청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효율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청을 담을 병은 병으로 된 음료수를 사서 구했는데, 입구가 너무 작았다. 깔때기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고, 급한 대로 복숭아와 설탕을 종이컵에 담아 작은 입구에 넣다 보니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칼도 조그만 과도 하나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니 그냥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비효율을 고수하며 복숭아 청을 만드는 기계.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휴대폰으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이렇게 기계처럼 일하고 있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는 걸 보니 아, 우리는 인간이구나 생각하고 싶어서. 인간이니까 군대에서 병사로 복무하고 있겠지. 병사 생활관엔 누가 있을까? 당직사관이 있다. 아차. 당직사관이 생활관 순찰을 돌다 우리를 보고 말았다.
"너네 뭐 하냐?"
"저희 지금 복숭아 청 만들고 있습니다."
S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청을 만들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 어 그래... 알겠다..."
당직사관은 생각하길 포기한다는 듯이 휴게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우리는 복숭아 청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도대체 클래식 음악이 군대에서 왜 들리는 건지, 또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하던 S의 동기 K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어쩌면 내가 비정상이고, S 너는 정상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을 내 멋대로 해석해 보았다.
"군대에서 복숭아 청을 당연하다는 듯이 만들고 있으니, 정말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군대에서 복숭아 청을 만드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데 대체 왜? 복숭아 청 만드는 게 뭐 대수라고.
아마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일 것이다. 병사로 복무하고 있는 내게 군대란 곧 억압을 의미했다. 군대에 있는 시간 동안은 억압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을 알게 되면 무기력해졌다. 무기력함은 군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활동까지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군대의 억압'에서 오는 무기력함을 핑계 삼아,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단정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군대에서 복숭아 청을 만드는 동안 나는 그렇게 주변의 눈치를 봤던 것이겠지. S는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이 묵묵히 복숭아 청을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군대에서 복숭아 청을 만들었다. 그것도 큰 병으로 두 통이나. S 것 한 통, 내 것 한 통. 이상하게도 S 것에는 복숭아가 내 것보다 많이 들어가 있었다. 병에 복숭아를 넣는 역할은 내가 맡았는데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S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내가 그 누구보다 먼저 S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S는 최근에 부대 안에 있는 헬스 동아리에 가입했다. 동아리가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건지. S의 추진력에 감탄하면서도, 이번에도 감탄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언제까지고 감탄만 할 수는 없다. 군대의 억압을 게으름을 부리기 위한 핑곗거리로 이용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