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는 생색을 내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
병사가 고생하길 원치 않지만 병사를 고생시키는 일을 한다. 나는 병사들이 언제 근무를 설지 정하는 행정병이다.
처음부터 행정병이었던 건 아니다. 전역을 앞둔 전(前) 행정병 A는 자신의 자리를 메꿀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게 나였다. 병사들의 근무를 구성하는 일은 부담스러우리라 생각했지만, 부담스러운 일을 해결하다 보면 배울 점도 많을 것 같았다. 근무를 좋아하는 병사는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최대한 공평하게 근무를 구성하자 다짐했다.
그런데 '공평함'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근무 개수만 잘 분배하면 공평하다 할 수도 있고, 일과가 일찍 끝나는 날에 근무를 서는 인원의 손해까지 고려해 근무를 구성해야 공평하다 할 수도 있다. 도저히 근무 개수만 잘 분배하는 공평함을 택할 수 없었다. 전전(前前) 행정병 B의 실수로, 서지 않아도 되는 근무를 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일병이었고 행정병 B는 병장이었다. "이 근무가 잘못 입력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B에게 말했지만 무책임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더러 알아서 해결하라 했다. 행정병은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무책임함을 보여주었고, 무책임함이 내게 준 피해는 엄청났다. 안 그래도 싫은 근무를 아무런 보상 없이 더 서야만 했다. 화가 났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어쩌다 보니 행정병이 되었다. 무책임한 행정병이 내게 준 피해 덕에 책임감 있는 행정병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책임감을 가지며 일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편의를 봐주다 보면 신경 쓸 것이 끝없이 늘어났다. 휴가 나가는 사람의 근무 제외시키기, 사이 안 좋은 사람들끼리는 같은 날에 근무 서지 않게 하기, 다른 일정이 있으면 그 일정에 겹치지 않게 근무 조정해주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하다 보니 근무를 구성할 때 항상 어려움이 있었다. 책임감 있게 일하자고 결심했다 해서 편의를 봐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싸매며 근무를 조정하더라도 어차피 사람들은 모를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아무도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생색을 내고 싶어 졌다. "너 휴가 나가는 기간에 근무 다 없애줬다?"라고 말하는 식으로.
호의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무슨 보상이 있을지 전혀 생각지 않은 행동이어야 호의라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바라고 행정병이 된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바라고 병사들의 고충을 줄여 주자고 다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병사의 사정을 잘 알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겠다는 마음뿐이었지만, 일을 해도 보상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드니 초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초심을 잃을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행정병을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행정병이 되었고, 해야 하는 일만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하려고 버둥거렸다. 근무를 구성하는 게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포기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책임감 있는 행정병이 되고자 했으니, 행정병만의 고충 또한 책임감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호의는 생색을 내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 '병사의 고충을 최대한 덜어 주겠다'는 호의를 온전히 살리려면 근무를 구성할 때 여러 변수를 고려하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든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 행정병이 될 때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많은 변수를 반영하고, 엑셀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오류를 손보고 나면, 드디어 병사들의 근무가 언제인지 알리는 '근무표 초안'이 나온다. 마치 합격 결과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처럼, 새로 나온 근무표에 병사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이제는 변수에 대응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병사들에게 이미 근무 일자를 통보한 상태에서 변수를 적용하면 갑자기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긴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글로 써내야만 한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