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행정병이 되는 법
엑셀 실력보다 중요한 호구 기질
군대에서 사람을 마음대로 골라 본 적이 있다. 나는 근무표를 짜는 행정병이었고 전역까지 두 달 남은 상태였다. 다음 행정병을 구해야만 했고, 이상하게도 병사인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
적임자가 딱 두 명 나왔다. A와 B. 둘은 동기였다. A에게는 엑셀 관련 자격증이 있었고 B에게는 없었다. 행정 업무를 볼 때 엑셀을 잘 다루면 좋긴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있다. 바로 '호구 기질이 있는가'이다. B는 부대 내에서 소문난 호구였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성격이 유쾌하지만 물러 터진 게 문제였다. 확신이 들었다. B구나. 병사 입장에서는 단호한 행정병보다는 물러 터진 행정병에게 부탁하는 게 편하겠지. 수많은 부탁을 여과 없이 들어주다 보면 병사의 편의를 봐주는 쪽으로 근무표를 짤 것이고, B는 병사에게 도움을 주는 행정병이 되리라 예상했다.
A는 B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A와 B는 싸운 적이 있다.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둘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자니 괜한 경쟁 구도를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A를 뽑는다면 물러 터진 성격의 B는 아무 말 않을 것이고, B를 뽑는다면 자기주장 강한 성격의 A는 불만을 드러낼 것이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피곤해진다는 걸 알았지만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B는 다음 행정병이 되었다.
본격적인 인수인계를 시작하기 전에 B에게 말했다. 해야 하는 일만 하기보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하는 행정병이 병사들에게는 좋을 것이며, 그래서 너를 행정병으로 뽑았다고. 행정병이 되고 나서 업무 방식을 정하는 건 B의 자유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말이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도 나의 '사서 고생하는' 업무 방식을 은근히 B에게 전달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B는 내가 B를 뽑은 의도대로 업무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B는 나의 업무 방식을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나처럼 일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B는 호구처럼 일하는 행정병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었다. 마음이 맞는 동료가 생긴 것 같았다. B와 함께 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인수인계가 끝난 뒤, 전역을 앞두고 B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전혀 짜증 나지 않았다. 어쩌면 B를 뽑은 이유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노력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물러 터진 성격의 B는 행정병이 되었기에 나의 고충을 이해해줄 수 있었고,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B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의 선택이 B의 고생길을 연 것도 사실이기에 미안함도 느꼈다.
나는 행정병 전용 컴퓨터에 B가 보게 될 쪽지를 하나 붙여두고 전역을 했다.
"당신을 행정병으로 뽑은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