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샴푸, 바디워시, 칫솔, 치약을 한 군데 때려 넣는다. 여분의 속옷, 양말, 잠옷 등을 가방에 구겨 넣는다. 얇은 옷 하나를 가방에 넣었다 뺐다 정확하게 세 번 반복 후에 결국은 뺀다. 마지막으로 어떤 신발을 신을지 10초간 고민하다 하나를 골라 신고 나온다. 아 이어폰! 문을 열고 신발 벗는 3초가 뭐 그리 아깝다고 꼬발로 가 이어폰을 주워 들고 나온다.(꼬발은 바닥 안 더러워지는 거 아시죠?)
아침부터 분주하다. 오늘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해를 벗어나는 여행을 갔다. 상해 거주민으로 어언 두 달이 지났기에 다시 외지인 신분으로 사실상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쑤저우(소주)라는 도시로 간다. 외국인이라는 특수 때문에 발생할 돌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기차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기차역으로 갔다.
혹시나 공항으로 잘못 온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기차역은 꽤나 컸다, 플랫폼만 해도 30번 대가 넘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중국 기차는 기차역에 들어갈 때 신분증과 짐 검사를 하고 기차를 타기 전 한 번 타고나서 한 번 더 진행한다. '맞아 너는 외지인이야'라고 알려주듯 외국인 신분증 검사는 자동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에게 확인받고 가야 한다. 상하이에서 쑤저우까지는 기차역으로 두 개 역, 30분이면 갈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남은 자리가 일등석밖에 없어 일등석으로 예약을 했는데 일등석인 이유는 역시 항상 존재한다. 쑤저우 역에서 내려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쑤저우 박물관으로 갔다. 즉흥 여행이라 제대로 된 목적지도 없이 갔기에 예약을 못한 상태였고, 그대로 입구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주(쑤저우)의 경우에는 다양한 관광지가 한 곳에 붙어있어 실패했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가 없다. 그대로 길을 가다 보니 졸정원(拙政园)이 보여 들어가려다, 여기도 예약이 필요한가 싶어 찾아보니 역시는 역시다. 위챗에 졸정원예약(拙政园预约)라고 검색하니 예원의 다양한 관광지를 예약할 수 있는 미니 프로그램이 나왔다. 졸정원의 경우에는 성인 기준 80위안, 한 시간 단위로 표를 판매하고 있었다. 진정 대 QR 시대. 이번에 중국에 오고 나서 관광지에 이 정도 돈을 쓴 건 처음이었다. 80위안만큼 보고 오겠다는 다짐 전에 배를 채우기 위해 동네 슈퍼에 들러 어묵과 소시지로 칼로리를 보충해 줬다.
어묵은 사실 한국 어묵이 최고지만, 종류는 한국보다 다양했다. 소시지는 한국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기름지다. 오랜 나 홀로 생활에 대화가 고팠는지, 슬쩍 사장님에게 말을 걸어 본다.
'확실히 한국 소시지 하고는 다르네요'
친절한 사장님은 그때부터 소시지 제품을 직접 보여주시며, 제품을 추천해 주셨다. 너무 맛있어서 물어봤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요즘에 외국인은 많아요??'
'요즘에는 뭐 거의 없지'
슈퍼 사장님 말씀대로 관광하는 내내 외국인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아 참, 다 외국인이지. 관광지 입장에서도 딱히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이미 사람은 충분히 넘치니 말이다.
졸정원에 대해 역사적인 내용을 찾아보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그저 관광하기에는 예전 높으신 분들이 풍악을 즐기러 오는 곳 같은 느낌이랄까.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녔지만, 사람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이미 익숙해져 버린 중국 풍경이라 그런 건지 큰 감흥은 없었다.
졸정원 구경을 마치고 핑장루(平江路)를 걸쳐 쑤저우(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중 하나인 쏭수구이위를 먹으러 갔다. 지나가는 핑장루마저 수향 마을 스타일이라 찾아보니, 쑤저우는 마르코 폴로가 '동양의 베니스'라고 극찬한 운하 도시이자 중국 고전 정원의 도시라고 한다. 실제로 관광지가 아닌 곳도 걸어 다니다 보면 수향 마을처럼 보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관광지가 정원 형태이다.
쏭수구이위는 생선을 배척하고 살아온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6년 전쯤 소주를 왔을 때 우연히 친구와 먹고 깜짝 놀랐던 음식이다. 얼마 전에 흑백 요리사에 정지선 셰프님이 이 요리에서 따온 음식을 만들기도 하셨고 '득월루'라는 짠내투어에 나온 맛집이 있다길래 굉장히 큰 기대감을 품고 갔다.
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예전만큼의 특별함은 없었다. 배불리 밥을 먹고 향한 곳은 중국에서는 5년 만에 방문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일반 숙박을 해도 문제없지만, 여행유튜버들처럼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젊음의 느낌을 받고 싶었다고 할까. 트립이나 부킹닷컴 같은 해외 사이트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우연히 중국 현지 어플인 고덕 지도에 검색하여 찾을 수 있었다. 베이바오쉴니엔 게스트하우스!(背包十年青年旅舍)
'안녕하세요~'
'숙박하실 건가요? 신분증 주세요' 여권을 드리니 약간은 귀찮은 듯한 뭐지 하는 표정으로 물어보신다.
'신분증 없어요?'
'아,, 네 제가 외국인이라서요'
'네??(갑자기 더 친절해진 태도) 외국인인데 중국어 잘하네요!' 역시 어느 나라던지 외국인이 그 나라 언어를 하면 비교적 환대를 받는듯하다.
'아니에요 ㅎㅎ 저 예약도 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예약도 중국식 이름으로 해 호감도 1%를 추가 적립할 수 있었다. 확실히 외국 어플에 나오지 않는 곳이다 보니 숙박하는 인원 중에 외국인은 나뿐이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외국인이 온 건지 여권으로 숙박 처리하는 것도 시간이 걸렸고 무엇보다 계속 외국인이라며 신기해하셨다. 외지인으로서 역할 100% 수행 완료. 방은 만 원에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싶은 정도였다. 고층에 위치해서 날씨는 흐렸지만 맑은 날 바라보는 풍경은 어마 무시할 것 같았다.
나도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있으면 말도 붙여보려 했는데, 다 중국인이라 무언가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아니 아무 말고 안 할 거면 게스트하우스를 왜 왔냐고요. 끝끝내 용기를 내지 못한 채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다시 핑장루로 향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돌아가는 일정이기에 야경까지 보고 올 심산이었다. 핑장루에서 스타벅스의 신메뉴를 야무지게 먹으면서 잠깐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온 건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하고 한국 가면 청소부터 해야지, 내 주식이 다음 주면 회복하겠지 와 같은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밖으로 나와 쑤저우 경제에 이바지할 5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어주고, 천천히 걸어가며 음식점을 찾아보던 중 깔끔해 보이는 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소주하면 쏭수구이위(그나저나 이름 너무 어렵네) 외에 새우를 면에 부어 비벼 먹는 요리가 유명한데 그 요리는 아니었지만, 소주 본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백탕, 홍탕이라고 불리는 기본 면은 천 원 정도 하는 가격이다. 아마 서민들이 주로 먹는 찐 본토 음식인 것 같다. 세트메뉴를 좋아하는 나는 이 식당에서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세트메뉴를 추천받아 주문했는데 또 생선이다. 무슨 한자인지 몰라 파파고에 물으니 장어란다. 장어구이는 많이 먹어봤는데 이렇게 흐물흐물하고 비주얼이 좋지 않은 장어는 처음이었다. 실제로 약간 쫀득쫀득하기도 한 게 물컹하고, 맛은 그냥 구수한 맛인데 도저히 내 입맛이 아니었다. 워낙 생선에 대해 각박한 혀를 가지고 있기에 형평성에 맞지 않아 맛없다고는 못하겠다.
밖으로 나와 하나 둘 밝아지는 건물들 사이로 사부작사부작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저녁밥을 먹고 비 오는 날씨에 참지 못하고 그만 숙소로 돌아와 앉아서 글을 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기타에 노래를 불러 주신다.
게스트하우스는 중국에서 青年旅舍라고 한다. 말 그대로 직역하면 청년들이 여행을 다니며 묵는 숙소다. 사실 단기로 여행 오는 사람들보다 시골에서 도시로 공부하러 또는 일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비싼 방값을 버티지 못하고 게스트하우스에 장기 투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럴까 슬픈 노래는 좀 더 슬프게 들렸고, 좀 더 여기 있는 분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느낌의 노래들이 많았다. 가사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들려오는 멜로디에 슬픔이 묻어있고, 감동이 묻어있었다.
감성 그대로를 가지고 오늘 하루도 마무리한다. 10명이서 자는 한 방에 005번이라는 번호가 적힌 한 침대에 눕는다. 기분이 이상하다. 다시 20대의 나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그때의 감성, 그때의 생각에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