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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May 18. 2023

DAY5. 루브르 박물관과 부산했던 저녁

원준이는 곤히 자고 있다. 오전에 눈이 떠질 때까지 자야지 했는데 6시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시차에 완전히 적응을 했는지 나이 먹은 티를 내는 건지 더 잠이 오지 않아, 앞서 여행객이 두고 간 롱고 에스프레소 커피와 비스킷을 먹으며 지난 며칠의 여행일정을 정리한다.


잠 귀가 무척 밝은 녀석이라 좀 있다 일어나서 키보드 소리 때문에 깊이 못 잤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겠다. 아빠와의 느긋한 파리여행을 기대했을 텐데 너무 강행군을 했다. 아닌가 아니라 나도 왼쪽 어깨가 찌릿찌릿하며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였을 때 몸이 보내는 증상이 있다.


10시가 넘어 원준이가 일어났다. 역시 예상대로 키보드 소리에 깊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다. 냉동피자 한 판을 오븐에 데워 마트에서 산 파리의 컵라면과 하이네켄 맥주 한 캔 먹고 나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온다. 원준이가 씻고 정리할 동안 잠깐 눈을 붙였다. 


오늘 <루브르박물관>을 소개해 줄 현지 가이드와 약속 시간에 맞춰 72번 버스를 탔다. 지난번처럼 버스를 타고 5유로를 주니 기사가 “no ticket, no ticket”하면서 그냥 타라고 한다. ‘아, 오늘이 부활절이라 대중교통이 무료구나’라 생각하며 창 밖을 보고 섰다. 두 정거장쯤 지났을까. 검정 재복인지 점퍼차림에 붉은 글씨의 완장을 한 일단이 무리들이 타더니 조금 무서운 분위기로 일제히 티켓 검사를 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황하며 5유로를 내밀었더니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머라고 한다. 벌금을 내야 한다는 얘기 같았다. 드라이버가 no ticket이라고 했다고 했더니 운전기사를 한번 슬쩍 보고는 두 말도 없이 그냥 지나간다. 너무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상황이 종료되었다.




<루브르박물관> 바로 옆 프랑스 국립극장 입구에서 가이드를 만났다. 한국인은 척 보면 서로를 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다. 프랑스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3년째 박물관 투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왠지 강단 있게 잘할 것 같은 인상이다. 투어 도중에 그녀의 강단을 확인했다. <모나리자> 앞에서 길게 늘어진 줄에 슬쩍 끼어드는 외국 관광객의 무리들을 모두 뒤로 돌려보내는 단호함을 보여줬다.


1,200년 전 파리의 요새였다가 왕궁이었다가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가면서 박물관이 된 루브르는 규모나 방문객 수나 전시된 작품의 수가 단연 압도적이다. 루브르가 소유한(?) 전체 전시물의 10% 정도를 전시하고 있는데 한 점당 30초씩 보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파리에 있는 3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시기별로 작품이 나뉘어 있는데, 루브르는 메소포타미아문명시기부터 프랑스혁명시기까지, 오르세 미술관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의 고흐, 모네 등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퐁피두에는 1914년 이후부터 현대 미술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감상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로 집중해서 감상해 주길 은근히 압박하는 가이드. 시작이 좋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잘 알려진 1,800년 전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현무암 동상에서 이 무지막지한 형법의 마지막 문장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데 무엇일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약속이라고 대답했다. 정답은 ‘용서’라고 한다.


지하 해자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들. 교과서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익숙한 본 것들이 많았지만 1:1.618의 황금비율로 현대의 미의 기준에 영향을 미친 기원전 130년 전의 <밀로의 비너스 상>과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상>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비너스 상이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에 해당되어 정적이고 이성적이라면, 헬레니즘 미술품의 으뜸인 니케상은 옷깃과 날개의 디테일이 훌륭하며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드레스가 마치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듯 역동성과 감성이 잘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르네상스 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빛과 표정’ ‘암굴의 성모’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특히, 여인의 초상화에는 빛이 투사되는 각도에 따른 음영 등을 연구해서 그림에 반영한 다빈치의 천재적 치밀함이 잘 드러나 보였다. 이어서 <모나리자>를 감상(?)했다. 감상보다 구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모나리자>도 예전에는 앞의 르네상스 관에 다빈치의 다른 작품과 함께 걸려있었지만 이제는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고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작품의 유명세나 특별함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몇 겹으로 늘어선 줄을 서서 관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우리 강단 있는 가이드분의 새치기 제재 신공을 보였다.


르네상스 작품을 지나 계몽주의, 낭만주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그림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깃발을 든 그 여신이 쓴 모자가 24년 파리 하계 올림픽의 마스코트라고 한다. 

마지막에 본 <메두사의 뗏목>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프리카의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난파된 후 무능한 리더에 의해 버려진 150여 명이 뗏목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광경으로 처절한 상황에서의 희망과 좌절, 절망과 죽음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으로 무능한 집권층에 대한 고발로 촉발된 여론으로 이후에 왕조의 몰락까지 이어졌다고.



박물관을 나오니 비바람이 분다. 저녁은 셋째 날 찾아갔다가 토요일 휴업이라 낭패를 본 베트남 쌀국수를 먹기로 했다. 구글로 검색하니 69번 버스가 박물관에서 바로 간다. 6시 5분에 도착예정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그리고 6시 20분 도착 예정이라고 정보가 업데이트된다. 먼가 이상하다 싶은 데다 비와 바람이 더 거세져서 우버를 불렀다. 그런데 도착 직전에 두 번이나 차가 근처에 와서 취소를 한다. 눈치 빠른 원준이가 아마 근처에서 공사로 차량진입이 안되어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말이 되는 것이 버스도 그렇고 우리 앞으로 지나다니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우버를 불렀다.


쌀국숫집은 서너 평쯤 되는 작은 식당이었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알찬 식당에 제대로 찾아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늘 그렇듯 세 개의 메뉴를 시켰다. 나는 매운 쌀국수, 원준이는 양고기 쌀국수를 시키고 소고기볶음밥을 추가로 시켰다. 식사 전 메일 한 통을 읽고 난 후 그만 멘붕에 빠져 쌀국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숙소 주인으로부터 내일 몇 시에 체크아웃할지 묻는 메시지였다. 체크아웃이라니… 갑자기 머리가 하얘져서 예약 내역을 확인하니 11일 체크아웃이 맞다. 4월 6일부터 11일까지는 에어비앤비, 12일은 호텔에서 묵고 13일 파리를 떠나는 계획이었다. 하루가 빈다. 11일 밤은 어디서 잔단 말인가. 우리 숙소는 이미 다른 예약이 있다고 한다. 모레 체크인 할 호텔에 빈 방을 확인하고 아고다에서 예약을 했다. 원준이는 재빠르게 체크아웃 후 내일 동선을 감안하여 파리동역 근처에 짐을 맡겨 둘 곳을 예약했다. 그러고 나서 펼쳐 놓은 짐들을 싸고 나서야 우당탕 상황이 종료되었다. 


원래 내일 저녁 숙소에서 구워 먹으려고 사 둔 소고기를 굽고 혼자 여행할 때 마시려고 쟁여 둔 소주 팩을 두 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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