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는 감정이 아니라 성실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 자리에서는 회의실 입구가 보였다.
회의실은 흡연이 가능해서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애용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담배, 믹스커피, 신문의 조합이면 민원인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작은 행복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 난 팀장님의 그 작은 행복을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을 때 다가가 퇴사를 말하면 서로에게 상처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은 바쁘게 팀장님과 회의실을 오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9시 반에 나갔을 나였지만, 그날은 모두가 나갈 때까지 모니터에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했지만, 가슴은 두근거렸고 머릿속은 “어떤 말”로 퇴사 이야기를 시작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팀장님이 회의실로 들어가셨다. 5분을 기다린 후 크게 숨을 한번 쉬고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팀장님은 신문을 펼치고 커피와 담배를 즐기다 갑자기 들어와 문을 닫는 나를 보며 큰 눈을 끔뻑였다. 그 앞자리에 앉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나의 말에, 팀장님의 얼굴에도 '올 것이 왔구나.' 표정이 떠올랐다.
그 후로는 횡설수설 나의 말이 시작되었다. 나조차도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고 말을 하는데, 팀장님은 “네 맘 다 안다.”라는 표정으로 전환하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렇게 내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는 시간이 20분이 지났다. 나에겐 첫 퇴사 선언이었을 줄 모르겠지만, 팀장님은 이미 수많은 신입들의 고백을 받은 상담자였다. 그 능수능란한 상담자는 30분간 나의 퇴사 선언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정한 퇴사에 대한 확신은 팀장님의 몇 번의 질문에 “저도 절 잘 모르겠어요.”라고 흘러가다가 “휴식이 필요해요”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난 1주일간의 장기휴가를 얻고 회의실을 나왔다.
첫 번째 퇴사 상담은 30분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30분을 위해서 난 입사 3개월 차부터 고민을 시작했었다.
첫 3개월간은 Samsung Value Program이 성공적으로 뇌에 안착한 덕인지 회사를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올해의 삼성인”이 되어있을 나와 그것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나만 보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난 후 내 눈에 보인 것은 10시에도 퇴근하기 힘든 삶, 더 많은 합의금을 요구하는 교통사고 피해자와의 실랑이, 부서 이동의 어려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현실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난 아직 26살 기회가 많아.”, “난 하고 싶은 일이 많았잖아.”라는 생각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라면 좋았을 테지만, 회색 빛 장막이 눈앞에 내려진 듯 세상이 부정적으로만 보이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그 이후 “퇴사”라는 단어는 항상 가슴 언저리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 단어가 그날 미팅에 처음으로 현실로 나왔는데 “휴가”라는 단어로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쉬는 법도 배워야 한다.”
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이 귓가를 맴돌았다. 갑자기 다가온 휴가에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학 때와 달리 난 아버지가 수리해주신 49만 km를 달린 SM5가 있었고 마침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 정환이가 방학 중이었다.
그날 저녁 대전으로 달려가 정환이를 픽업했다. 그리고 전라도 순천 선암사를 향해 달려갔다. 갑작스러운 휴가에 당황한 나를 위해 정환이가 계획한 경로였다. 운전 초보, 흔들리는 마음, 초행길, 덜컹거리는 차에 마음은 불안했지만 친한 친구가 있어 마음을 다스리며 겨우겨우 도착을 했다.
선암사에 가려면 무지개 모양의 승선교를 건너야 했다.
승선교에는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오는 중생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 의지와 물소리,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메시지 덕분에, 14m의 다리를 건너며 넥타이처럼 목을 매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종교적 장소가 주는 안정감 덕분에 가슴 깊은 곳이 열리고 차분한 호흡이 찾아왔다.
스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후부터는 친구와의 대화도 줄이고 절의 일정에 따랐다. 식사 시간에 식사를 했다. 예불 시간에 예불을 했다. 저녁에는 잠을 잤다. 새벽에 일어나 108배를 할 때도 한배, 한배에 정성을 다했다. 중간에 잡념은 많이 끼어들었지만, 적어도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그 순간에 충실하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가니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강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적절한 구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승선교 전의 세상에서 나는
불완전한 삶을 완전하게 만들려는 강박에 무너지고 있었다면,
vs
승선교 너머의 선암사에서는
완성된 선암사의 규칙에 따르며 나를 찾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내게 남겨준 것은 “발이 붙어있는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로워지면, 내게 시간이 생기면 난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휴가 2일 차가 되었을 때 난 현실 도피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도피마저 나에게 큰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가정” 속에서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존재하지 않는 불안한 미래”만을 그리며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사표를 내기 전에 해야 할 일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것과 퇴사 후의 계획을 선명하게 그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