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 몇 사람이 모여 저녁을 먹는다. 걸쭉한 농담에 듣기 싫지 않은 욕도 주고받는 모습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같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 A씨가 화장실에 가면서 계산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A씨는 '오늘은 내가 계산했어.' 하고 말한다. 친구들은 약간은 당연하다는 듯 '잘 먹었다.' 하고 한마디씩 했다.
왜 A씨가 저녁값을 냈을까? 원래 A씨가 저녁을 사기로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왜 A씨가 계산을 했을까? 또 일행은 미안해하지 않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을까?
친구나 선후배 관계의 중년 남자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초대한 사람이 특별히 없어도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저녁식사비를 계산한다. 왜 혼자 내느냐, 나누어 내자, 아니면 서로 내겠다는 시비도 없이 자연스럽게 일행 중 한 사람이 저녁값을 부담한다. 보이지 않는 밥값 내는 순서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깔끔하게 네 글자로 정리된다.
"商現高老" (상현고노)
첫째는 ‘상’(商)이다. 즉,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거나 기업에서 일하는 친구가 밥값을 내는 최우선 순위이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도 ‘상’에 해당된다. 자유직업인, 즉 프리랜서는 수입이 크지 않은 한 ‘상’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은퇴한 친구끼리 밥을 먹는 경우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 회사에서 일했거나 사업을 했던 사람이 낸다.
둘째는 ‘현’(現)이다. 현직에 있는 사람이 낸다. 친구 중에 현직 임원과 은퇴한 CEO가 있다면? 현직 임원이 낸다. ‘상’과 ‘현’을 합해서 ‘법카의 원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상’과 ‘현’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현직 고위공무원과 은퇴한 임원이 만나면 누가 밥값을 내느냐 하는 것이다. ‘상’이 ‘현’ 보다 우선 순위가 높으니 은퇴한 임원이 내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인격이 원칙을 압도하여 현직 고위공무원이 내기도 한다.
셋째는 ‘고’(高)이다. 직급이 높거나 높았던 친구가 낸다. 은퇴한 임원과 퇴임한 CEO가 있으면 당연히 퇴임 CEO가 낸다. 은퇴한 임원이 CEO 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라고 해도 퇴임 CEO가 낸다. 중소기업 사장에서 퇴임한 친구와 대기업 임원으로 어마어마한 급여를 받던 친구가 만나면 누가 낼까? 신발 빨리 신는 사람이 낸다. ‘고’ 이후부터는 이렇게 원칙이 유연하게 적용되기 시작한다.
넷째는 ‘노’(老)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낸다. 비슷비슷한 규모의 회사를 다녔던 퇴임 임원 두 분이 만나면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선배가 낸다. 물론 선배가 빛 보증 잘못 서서 어려운 상황이라면 후배가 낸다.
이렇게 원칙을 설파하면 사례를 들어 원칙의 권위에 도전하는 분들이 있었다. 즉, 일행에 여성이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같은 상(商)이지만 소득이 천차만별인데 누가 내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성별과 소득 수준이 개입되면 알고리즘이 복잡해진다. 후학(後學)에게도 할 일을 남겨 두고자 한다.
사적인 모임이라고 밝혔지만 지극히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관점이나 사농공상(士農工商)적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베품’의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도 내가 밥 한 번 편하게 살 수 있을 때 사겠다는 마음이다. 일이십년이 흐른다고 한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 처럼 나눠 내게 낼까?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베품은 한국인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세상사는 이치이다. 이치를 거스르면 벌 받는다.
필자와 식사했을 때 위의 원칙과 다르게 자신이 냈으니 이치에 거슬렀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섭섭해 하지 마시라. 원칙이고 뭐고 저는 밥 사주는 분을 존경한다. 이치를 거슬린 벌은 달게 받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