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위로
좋아하면, 상대방이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지만, 사랑하면, 상대방이 내가 없어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랑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 내리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정말 그럴까? 한 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맞는 말 같았어요. 혹시 무슨 사고를 당해서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해리포터에서 헤르미온느가 큰 전쟁을 앞두고 자기 부모님의 기억을 지운 것도 사랑해서였기 때문일 거예요. 자식의 죽음에 평생을 괴로워할 테니까요. 저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사랑은 "나"와 무관하게,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해요. 그래서일까요, 제 불행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게 됐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데, 철저한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면요, 기쁨을 나누면 두 명이 기쁜 거고, 슬픔을 나누면 두 명이 슬픈 거예요. 그래서 기쁜 일은 말하려고 하지만, 슬픈 일은 말하지 않으려고 하죠. 사랑하는 사람이 저 없이도 행복하길 바라면서, 저로 인해서 슬픈 감정을 느끼는 건 너무나도 민폐 같이 느껴지니까요. 이게 얼마나 오만한 사고방식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 역시 사랑의 방식이라는 걸 모르지 않죠. 그럼에도 잘 되지 않아요. 또 한편으로는, 괴로움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게 확실시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회피하는 경향도 있어요. 감정은 휘발성이라서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잖아요. 하지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를 말하면, 저는 순식간에 "그런 애"로 찍혀버리는 거니까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속내를 꽁꽁 숨기고 최대한 말 수를 줄여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안 아픈 곳이 없었죠.
겉이 멀쩡하면 뭐해요, 속이 썩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내놓은 해결책이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아는 사람한테는 못하겠으니,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서 어떻게 생각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인 타인에게 말하는 거죠. 생각보다 효과가 좋더라고요. 그것도 얼마 안 가긴 했지만요. 그런데 이 날은, 외로웠어요. 의지할 곳도 없다고 여겨졌고, 하필이면 센티해지게 비가 내렸거든요. 그래서 잠시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물로 젖은 흙의 축축한 비린내를 맡으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우비에 장화를 신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요. 나도 저랬었는데, 저땐 정말 해맑게 웃을 수 있었는데, 하는 "라떼는 말이야" 발상에 젖어서요. 문득, 아이가 절 쳐다보면서 다가오는 걸 알아챘죠.
"비가 와서 슬퍼요?" 아이가 묻더군요. 눈엔 순수한 빛이 아른거렸어요. 무장해제되어버렸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슬퍼요." 뭐 때문이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솔직하게 대답했어요. 열심히 걷고 있는데, 그게 사실은 뒷걸음질이었다는 걸 알아서 속상하다고요. 남들은 최선을 다해서 뛸 때, 나는 휘청거리면서 뒤로 걷고 있었다고요. 뭘 해도 안 될 때였거든요. 그랬더니 아이가 갑자기 걸어온 길 반대로 걸음을 내디뎠어요. 뒤로 말이죠. 다칠까 봐 놀라서 아이를 불렀지만, 헤헤 웃으면서 말을 듣지 않더군요. 결국 넘어진 아이 모습을 보면서 그래, 내가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니. 약간 자책을 했어요. 그런데도 다시 일어나서 또 그러더라고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소리치더라고요.
"대단한데요? 뒤로 걷는데 넘어지지 않았다니." 이명이 온 것처럼 머리가 띵했어요. "난 이렇게 넘어졌는데, 누나는 넘어지지도 않고 걸었으면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앞으로 걸을 땐 엄청 빠르겠다. 그쵸?" 세차게 내리는 빗물이 모든 걱정거리를 데리고, 그대로 몸 밖으로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고 잘 버텨왔구나, 언제든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방향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니까요. 아이는 씩 웃고 어딘가로 뛰어갔어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저 아이의 무한한 행복을 바랐죠. 정말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본 누군가에게 갖는다니, 여전히 얼떨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