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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나리 Apr 29. 2018

#5.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조직문화

업무효율 저하, 자존감 하락, 체중감량은 옵션

그림왕양치기의 '약치기 그림' 중

첫 회사에서 인턴 종료 후 계약직으로 전환되자마자 대규모 인사이동과 함께 몇 달 전 나의 신분과 같은 인턴들이 들어왔다. 무려 10명이나. 동시에 선배, 팀장님은 다른 곳으로 발령 나고 팀장부터 인턴까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키워보겠다는 회사의 의지였다. 기존 업무를 아는 사람은 세명뿐인데 새로운 사람은 12명이었다. 기존에 내가 했던 일들을 인턴에게 넘기고 나는 선배들이 했던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나도 새로운 업무 숙지중인데 인턴들과 새로 발령 온 선배의 질문이 쏟아졌다. 똑 부러지고 시크한 동기와 한량 선배보다, 거절 못하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내가 다들 편했을 것이다. 얼마 전 내 처지와 같은 인턴들을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질문을 받아주고 설명해주다 보면 시간이 훌쩍훌쩍 갔다. 그렇게 내가 할 업무는 밀려가고 야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요령이 없이 미련했다. 난 계약직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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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회사는 인트라넷으로 일일 업무 보고를 썼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시간별 업무보고였다.

아침에 출근해서 시간별 업무계획을 써서 팀장에게 보고하고 팀장은 빠진 업무가 없는지, 더 해야 할 업무가 없는지 점검하는 시스템이다. 시간표 양식에 업무를 채워 넣는 방식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중·고등학교 시간표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오후 2~4시에 '00 기획서 작성을 위한 사전 조사 및 경쟁사 모니터링'을 적어놓으면 팀장이 '경쟁사 모니터링을 2시간이나 해야 하나요?'라고 피드백을 하면 급하게 한 시간으로 줄이고 그 칸엔 다른 업무로 채워야 한다. 그리고 퇴근 시 시간표에 채워진 업무에 대한 증거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업무라는 게 1시간 땡 하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니 항상 시간에 쫓겨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업무계획은 나를 옭아맸다. 표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 업무를 그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림왕양치기(양경수) - 일하기싫어증

모든 업무는 인트라넷으로 이루어졌다. 전체 공지가 게시되면 모든 직원들에게 쪽지가 가고 직원들은 이를 확인했다고 댓글을 작성해야 한다. 만약 일정 시간 내에 댓글을 작성하지 못했다면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말 그대로 타당한 알리바이가 있어야 한다. 언젠가 300명 중 댓글 달지 않은 3명을 찾아내 이유를 묻고 질책을 받았다는 소문이 전해 내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프로 댓글러가 되었다.

확인해야 하는 글이 쌓이면 쪽지도 쌓이게 된다. 매일 아침 로그인해서 쪽지 확인하는 것이 업무의 시작이었다. 쪽지 알람을 꺼두는 기능도 있는데 이를 뚫고 나오는 강제 팝업 기능도 나중에 생겼다. 역시 기획/마케팅하는 회사라 그런지 다들 참 창의적이었다.

한참 바쁠 때 새벽까지 야근하고 집에서 자다가 일하는 꿈을 자주 꿨다. 인트라넷 로그인을 했더니 쪽지가 200개가 와있고 강제 팝업이 마구 뜨는 비상상황이 생겨 멘붕상태였던 적이 여러 번이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 등골이 오싹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비효율적인 업무체계였다. 30분이면 될 업무를 쓸데없는 피드백과 댓글놀이, 체크리스트로 2~3시간이 걸리게 된다. 보고 글이나 기획서 등 작성할 때마다 체크리스트에 내가 제대로 썼는지 체크해야 하고 이를 어길 시 프로 댓글러(상사/임원)들이 와서 지적해주는 시스템이다. 물론 업무보고 시 정확성을 높여야 하는 부분은 인정하지만, 너무 불필요하고 자잘한 체크는 업무효율을 떨어뜨렸다.


업무를 진행하다 실수를 할 경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로 300여 명이 보는 전체 게시판에 6하 원칙에 맞춰 교육자료를 작성했다.

ㅁWhen - 지난주 금요일 00 업무를 수행 중
Where - 00 사이트 게시물에
What - 링크를 잘못 올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Why - 타 게시물에 올려야 할 링크와 혼동하였습니다.
If -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되면 유저가 다른 링크를 타고 들어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How - 여러분은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통해 업무에 실수가 없도록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1) 링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2) 게시물 업로드 후 다시 한번 확인한다
3) 팀원과 더블 체크한다.

기억을 더듬어 작성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 교육자료는 팀장, 본부장의 컨펌을 받아야 하기에 여러 번 수정한다. 취지는 좋지만 막대한 손해를 부르는 실수도 아닌 자잘한 실수 한 번에, 교육자료 작성하고 컨펌받는 시간낭비 + 수치심을 얻을 수 있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을 업무 하는 내내 달고 살아야 했다.



첫 회사에 다니는 1년 반 동안 워라벨은 커녕 걱정없이 푹 자는게 꿈이었고, 살은 7kg가 넘게 빠져 내 인생 역대 최저 몸무게를 갱신했다.

그래도 첫 회사라 기본적인 직장생활예절, 문서작성능력 등을 제대로 배우고 나왔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업무 압박은 오히려 능률을 떨어뜨린다.

가끔 잡플래닛에서 리뷰를 찾아보는데 지금도 여전한 회사.

지금 연봉을 2배 넘게 준다해도 다시 다니라면 사양할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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