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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Aug 10. 2018

세상을 이끌어가는 엉덩이의 힘

인내심의 위대함에 대하여

소설은 무엇으로 쓰는가?


얼마 전 Fiction writing 워크숍에서 교수님이 했던 인상 깊었던 말씀이 있다.

머리로? 재능으로?


소설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 You don't write with your brain, you write with your butt.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여도 진득하게 앉아 쓰지 않으면 머릿속 이야기는 절대 종이 위로 옮겨지지 않는다.

지구력, 인내심,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해 나가는 힘이야 말로, 무언가를 해내는 데 있어 재능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다.


재능보다 중요한 게 엉덩이 힘이다. 엉덩이 힘을 키워라.


교수님은 미국에서 소설을 여러 권 출간한 소설가다. 소설은 엉덩이로 쓰는 거란 말은 교수님이 학생 때 다른 소설가에게 처음 들었던 말이란다. 아무리 글을 쓰는 재능이 뛰어나도 몇 시간이고 앉아서 꾸준히 써 나가지 않으면 소설을 완성시킬 수 없단다. 머릿속의 이야기는 한낱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앉아서 쓴 만큼, 딱 그만큼만 소설이 된다.


교수님은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하루에 몇 시간은 반드시 책상에 앉아서 일 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느슨해지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단다. 소설책 한 권이 나오는 데는 재능보다는 지구력, 인내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나 자신을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 내내 반 대표 달리기 선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늘 추천을 받아서 나갔다. 육상부 선생님이 와서 육상을 하라고 권유한 적도 많았다. 나는 단거리는 빠른데, 장거리는 늘 평균 이하였다. 백 미터 달리기는 어려울 게 없었다. 그냥 있는 힘껏 달리면 몇 초 이내로 끝났다. 그러나 장거리 달리기는 끈기와 인내, 속도조절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조절하지 않으면 금세 숨이 차올라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며 간신히 끝내기 일쑤였다.


인생은 장거리 달리기다. 단거리처럼 뛰다간 처음엔 빨리 달리는 것 같이 보여도 
금방 지쳐 완주할 수 없다.


수능 후 재수를 하는 친구가 나보다 일 년 뒤쳐지는 거 같아도 훗날 그 친구가 나보다 앞서갈 수 있다. 친구 중에 나만 모태솔로로 첫 연애가 늦어져도 훗날 결혼을 누가 먼저 할지는 모르는 것이다. 누가 결혼을 먼저 했는가와 상관없이 출산이나 이혼을 누가 먼저 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먼저 입사했는가와 누가 먼저 승진을 하는가가 별개인 것처럼, 인생의 속도는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내가 지금 앞서는 것 같아도 들뜨지 말아야 하고, 내가 뒤처져 있어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자신에게 최적의 속도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나는 장거리에 약해서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한 걸까? 나는 빠르게 집중하고 바로 결과를 내는 것에 더 흥분했다. 달리기 잘하기로 소문난 애였는데 오래 달리기는 언제나 숨을 헉헉대며 꼴찌로 들어왔다. 지구력의 문제였다. 나는 늘 지구력이 딸렸다. 일을 할 때도 회사에 대해 조사하고, 면접에 합격하고 일을 시작하기까지의 추진력은 늘 좋았지만 시작하고 나서 배우는 재미가 사라지면 곧 흥미를 잃었다.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는 집중도 잘하고 에너지가 넘쳤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서는 축축 쳐지곤 했다.


그렇게 또 새로운 분야로 새로운 회사로, 새로운 공부로 옮겨가 시작하길 반복했다. 호기심은 넘쳤고 배우기도 빨리 배워서, 뭔가를 처음 해도 중간은 갔다. 여러 가지 일을 했기 때문에 생긴 눈치와 노하우도 늘어갔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사회인으로서 잘 살아가는데 필요한 핵심 요소는 지구력이었다.


*L의 이야기

지인 중에 뉴욕 유학시절 레스토랑 알바를 구하지 못해 그보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알바를 해야 했던 친구가 있다. 뉴욕의 레스토랑 업계에서 일하려면 빠릿빠릿하고 손발이 빠르고, 눈치도 있고 빨리 배우는 능력과 순발력 등을 필요로 하는데 그 친구는 그런 게 부족했다. 저렇게 느리고 센스가 없어서 어디 가서 일을 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생계를 위해 레스토랑 일을 구해도 늘 금방 잘려서 결국 시간당으로 주는 주스 가게나 슈퍼마켓 캐셔 같은 것을 해야 했다. 그는 졸업 후 미국 회사에 취업해서 몇 년간 일에 적응하고 업무를 배우기 위해 기나긴 업무시간과 격주 토요일 업무, 회사 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묵묵히 견뎠다.


천천히 하나씩 배우며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한 그는 7년 여간 한 회사에서 일하며 이제는 한 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며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그를 그 자리에 데려가 준 건 순발력도 재능도 아닌 지구력, 인내심, 버티는 힘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일에 싫증을 내거나 다른 기회를 찾아 일이 년 만에 그만둘 때 그는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일했다. 그 사이에 회사가 크게 성장했고 그 부서를 맡겨야 할 사람으로 그 친구만 한 적임이 없었다. 그는 끈기와 성실함으로 지금은 내 주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었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는데, 나는 버티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S의 이야기


대학교에 다닐 때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알바를 했던 친구가 있다. 딱히 용돈을 직접 벌어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영화 보는 재미,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로 대학 재학 내내 같은 곳에서 일했다. 졸업할 때가 됐을 때 난 S가 극장 알바를 그만두고 취업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만두지 않았고 나는 미국으로 왔다. 십여 년간 미국에서 다양한 도전을 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안 그 친구는 그 긴 기간 한 분야에서 일하며 내실을 단단하게 다졌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을 때는 이미 국내 다양한 도시에서 일한 후 한 지점을 책임지며 수많은 직원들을 담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극장에서 일한 경력이 쌓이니 메이저 영화배급사나 다른 영화 관련된 일로 이직을 할 수 있는 다양한 길도 열려 있었다. 일에 여유가 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다니고, 짧게라도 뉴욕에 와서 원하는 만큼 실컷 쇼핑하고 휴식을 즐기다 갈 만한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마음 한 켠에는 본인의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꿈을 갖고 있는 그녀는 그동안 성실하게 일궈온 커리어와 끈기가 그 어떤 꿈도 이루어 줄 것이라 믿는다.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앤젤라 리 덕워스(Angela Lee Duckworth)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더 똑똑한 아이들이 아니라 "견디는 힘(Grit)"이 뛰어난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삶의 어디서도 진가를 발휘하는 건 지능이 아니라 지구력, 견디는 힘, 엉덩이로 버티는 힘이라고 한다.


20대 초반의 나는 세상을 한 방향으로만 봤다. 뭔가 크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몸값을 불리고, 위험을 부담해가며 크게 성공하고 내 분야의 최고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이었다.


삼십 대가 되어보니 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무엇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갑자기 크게 성공해 큰돈을 번 사람보다 한 직종에서 꾸준히 내실을 다져서 한 계단씩 오른 사람들이 가장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나랑 성향이 비슷해서 분야를 여러 번 바꾸며 새로운 도전을 해 온 친구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평생 일하고 퇴직하신, 그야말로 인내력 갑인 분이시다. 자꾸만 분야를 바꾸는 친구를 보고 한 말씀하셨단다. “한 가지를 오래 해야지. 언제까지 졸병만 할래?”


좀 더 어렸을 때 그런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나도 다르게 살았을까? 다르게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사람들 성향은 다 제각각이라서, 호기심 넘치는 나는 평생 졸병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내내 졸병으로 살아온 내가 온몸으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지구력의 중요성이다. 엉덩이 힘이 세상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의지나 체력이 아닌 엉덩이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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