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보다 중요한 성향
드라마에 부모님의 강요로 의대에 억지로 들어간 학생이 첫 해부 수업에서 구역질을 하며 뛰쳐나가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과장된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억지로 꾸역꾸역 밀고 나가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긴다.
한국과 미국의 다양한 직종을 거치며 깨달은 건,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자기에게 더 잘 맞는 일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면 적성과 안 맞는 일을 하는 것에 비해 확실히 부담이 없고 수월하다.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어도 몇 년간 일하며 쓴 맛 단 맛 다 보고 나면 여느 직장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일이 인에 박힐 정도로 일하고 나면, 애초에 좋아서 시작했던 게 크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일 이상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일하는 분야가 유난히, 특별히 힘들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 패션업계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 우리 광고 쪽 일이 원래 야근이 잦고 스트레스가 많다. 우리 레지던트들은 밤낮도 없이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일하고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그래 봤자 간호사들의 태움에는 명함도 못 내민다. 유명인이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일이 늘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서 늘 불안하고, 대중의 질타와 손가락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승무원들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밥 먹듯 하고 전자파를 많이 받아 불임이 되기도 한다...
최근 realsimple닷컴에 올라온 스트레스 많은 직업군 순위를 보면 1위부터 비뇨기과 전문의, 마취의사 보조, 마취 전문 간호사 순으로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직업들이 상위에 랭크되어있다. 그러나 세상에 직업은 셀 수 없이 많고 어떤 직업에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스트레스 포인트가 존재한다.
예전에 바텐더로 일하던 시절 단골로 오는 J라는 손님이 있었다. 그는 뉴욕의 지상파 방송국의 아침 뉴스 앵커였는데 주중에 해피아워에 와서 생맥주 한두 잔을 마시고 가곤 했다. 그가 바에 앉아있으면 종종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고 같이 사진을 찍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거의 십 년째 그 뉴스의 앵커로 일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훌륭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백인 남성이었다.
내가 알바를 하던 곳은 가라오케 바였는데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소수의 손님들이 거의 매일 오다 보니 인종, 나이, 직업을 떠나 서로 많이 가까워졌다. 단골들끼리 절친이 되어 같이 여행도 가고 서로 결혼식에도 가는 등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된 곳이었다. 자연스레 누군가의 생일이면 다 같이 파티를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날도 며칠 후에 단골 중 누군가의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생맥주를 마시고 있는 J에게 금요일 생일파티에 올 거냐고 물었다. 그냥 일상적인 질문이었는데 그는 흥분해서 내게 말했다.
"파티! 파티 좋지! 아이 러브 파티! 근데 나는 지난 십 년 동안 파티를 가본 적이 없어. 대낮에 시작해서 저녁때 끝나는 파티가 있니? 나는 매일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세시 반까지 출근해야 돼. 그러려면 빌어먹을 밤 8시에는 잠에 들어야 된다고! 여름에는 8시에 아직 해도 안 지고 밖이 환한데도 나는 억지로 자야 돼. 그래서 여기 해피아워에 마시고 7시 반 전에는 집에 가야 되는 거야. 그래야 집에 가서 8시에 잠이 들 수 있거든.”
그는 혼자 흥분해서 씩씩거리며 시계를 보더니 맥주를 원샷했다.
“봐, 내가 왜 술을 빨리 마시는지 알겠지. 나는 이제 사람들이 퇴근하고 와서 Fun이 시작될 쯤이면 얼른 집에 가야 돼.”
모두가 부러워하고 있던 아침 뉴스 철밥통 앵커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니 그가 바에 앉아 있을 땐 늘 창밖이 환했고, 캄캄할 땐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처음 아침 뉴스를 맡았을 때는 3~4년 정도만 하고 밤 뉴스로 옮겨주는 걸로 얘기가 되고 시작했었는데 쭉 하다 보니 십 년을 하고 있었고, 그동안 저녁 뉴스 앵커가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옮겨주지 않아서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아침 뉴스 스케줄에 맞게 살다 보니 자기는 30대와 40대 초반의 인생을 이브닝 파티나 밤문화와는 철저히 등지고 있더란다. 내가 아는 J는 누구보다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남몰래 작사 작곡한 노래도 몇 곡 있었고, 혼자서 배운 기타 연주도 꽤 훌륭했다. 술도 좋아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하는 미식가였다.
저녁이 없는 인생이 그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업무의 분야보다 업무의 유형과 성질이 본인의 성향에 맞는 것도 중요하다.
J는 유명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널리스트로서의 커리어가 중요하긴 해도 저녁의 시간이 전혀 허락되지 않는 십 년간의 인생이 끔찍하리만큼 괴로웠던 것이다. 만일 타고난 아침형 인간이거나 술도 밤문화도 즐기지 않고, 한낮에 하는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새벽 3시 반 출근이 훨씬 더 견딜만할 수도 있다.
적성 이상으로 중요한 게 성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 남편은 어렸을 땐 생각 없이 팡팡 놀다가 30대가 돼서야 철이 들어 영화학교에 갔다. 영화학교에 가는 많은 학생들이 감독을 꿈꾼다. 그런데 남편은 다른 학생들보다 인생 경험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판단해 영화감독보다는 카메라 조작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졸업 후 몇 년 동안 취업을 시도하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에 가까스로 운이 좋게 누군가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일 년 여 간 각종 시험과 면접 등을 거친 후 할리우드 카메라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십 년 넘게 드라마와 영화 제작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과 같은 해에 영화학교를 졸업한 수백 명 중 실제로 영화 쪽 일을 하는 사람이 남편 외에는 단 한 명밖에 없다고 한다.
영화를 배웠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간호사, 레스토랑 사장, 세일즈맨 등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영화 쪽에 발을 디딘 남편도 매일 출근하기를 힘들어하고, 작품 하나 끝날 때마다 그 분야를 아예 떠나고 싶어서 진지하게 다른 일을 알아본다. 그의 수많은 동료들이 늘 다른 일을 고려하고 있다. 실제로 영화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 소식이 매년 한두 번씩 들려온다. 할리우드 노조에 가입된 영화,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은 연봉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고, 어시스턴트들도 몇 년만 일하면 보통 한국돈으로 억대 연봉을 받는다. 5년 이상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억대 연봉을 훌쩍 넘고, 하나같이 치열한 경쟁을 제치고 그 분야에 들어와 정착했는데도 떠날 땐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일 년에 2억 가까이 벌던 남편의 동료는 식당을 차리기 위해 관뒀고, 다른 한 명은 간호사가 되기 위해 영화일은 파트타임으로만 하며 간호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영화인을 꿈꾸는 수많은 인력들이 세계에서 몰려들어 도전하는 할리우드인데도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결국 요가강사나 식당을 차리기 위해 그만두는 게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그만두는 이유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새벽 출근이나 밤샘 촬영 등의 스케줄, 폭염이나 혹한의 날씨에 야외에서 일해야 하는 것 등에 대한 피로를 견디기 힘들어 다른 일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하나같이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열정을 갖고 뛰어들었지만, 밤낮없이 일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게 얼마나 삶을 피폐하게 하는지는 간과했던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에 그 일을 말리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의외로 자신의 성향이라는 것은 직접 부딪혀보기 전에는 모른다. 어떠한 직업에도 어둡고 초라한 단면이 있고, 그런 부분은 직접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다.
나도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 부동산 중개인의 일에 뛰어들었을 때 "세일즈" 업무에 대해서 크게 간과했다. 그 직업은 "부동산" 일인 것에 앞서 "세일즈" 직업이었다. 사람을 만나길 좋아하고 어느 그룹에서나 쉽게 융화되며 거절을 받는 것에 무덤덤하고, 누가 독한 말을 퍼부어도 금방 잊고 동요되지 않는 성격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와 정반대의 성격에 가깝다.
5년여간의 부동산 일을 끝내고 난 지금도 부동산에 아주 관심이 많다. 부동산 일을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늘 집에 관심이 많고 이사 갈 예정이 없어도 늘 집을 알아보며 시장의 동향을 살핀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인으로서의 경험이 나에게 다양한 면에서 배움을 줬을지언정 내 성향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뉴욕의 대형 회계사 펌에서 일하는 사람이 업무 중 가장 힘든 일이 클라이언트를 관리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거라고 했다. 또 광고 디자인 쪽 일을 하는 사람이 업무에서 프레젠테이션 스킬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커서 그만두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무리 관심과 열정이 넘치는 분야여도 자신의 성향이 그 일의 성질과 맞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고자 하는 직업의 본질과 자신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일에 뛰어들면 결국 많은 시간을 들이고 생고생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맨해튼의 잘 나가던 어느 변호사는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뒤 우체국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일 년에 어마어마하게 벌던 변호사 시절과는 연봉이 비교도 안되지만, 혼자 조용히 운전하고 배달하는 매일 일상이 정말 행복하다며 이제야 사는 것 같단다. 앞뒤 상황 모르고 들었을 때는 놀라운 얘기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이직의 유형이다. 성향의 중요성을 알고 나서 들어보면 이상적이고 일리 있는 결정이다. 직업을 선택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성향에 대한 조사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