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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Jul 25. 2018

전단지 돌리던 아이

세상은 딱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인다

중학교 1학년 때였나.


방과 후에 서너 명이서 친구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우리들이 모처럼 놀러 왔다고 친구 어머니가 김치부침개를 만들어주셨다. 친구가 주방에서 엄마한테 받아온 부침개 접시를 내려놓자 우리 중 한 명이 "와~ 너희 엄마 진짜~" 하고 탄성을 질렀다.


당연히 그 뒷말은 "솜씨 좋으시다" 라던지 "요리 잘하신다"라는 말이 이어질 뉘앙스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했던 말은 의외로 "더우시겠다"였다. 

"와~ 너희 엄마 진짜 더우시겠다!"


나는 순간 그 말이 너무 엉뚱하게 느껴져서, "야 '더우시겠다'가 갑자기 왜 나와" 라며 빵 터졌고, 친구들도 한겨울에 뭐가 덥냐며 웃었다. 그녀의 말이 전혀 내 예상 밖이어서 신기했다. 어떻게 똑같은 걸 보고 저 생각을 할 수 있지? 싶은 마음이었다. 그 친구는 "너네가 몰라서 그래, 주방에서 이런 거 부치면 얼마나 땀나는지 아냐? 아마 지금 엄청 더우실 거야."라고 했고, 우리는 "뭐래~" 하며 별생각 없이 맛있게 해 주신 음식을 먹고 놀았다.


그 애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쭉 친하게 지냈는데, 알고 보니 그 애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딸이 넷 있는 집의 둘째였다. 3년 간 그녀를 점점 알아갈수록 그날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종종 떠오르고, 더 잘 이해됐다.


그 친구와 더 가까워지고 나서야 당시 열네 살이던 그 친구가 분명 한겨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이 있었을 거란 생각에 이르렀다. 분명 그걸 해봤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곱씹을수록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뭔가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와는 중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는데, 아마 자기가 그날 그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못할 것이다. 그날 함께했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말이지만 어린 내게는 인상 깊게 남았고, 2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나보다 공부도 더 잘했던 그 친구는 결국 취업을 위해 상업고에 입학했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쯤 건너 건너 들은 바로는 이미 직장인이 되었다고 했다. 연락은 안 되지만 분명 어디선가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어른이 되어있을 친구가 가끔 생각난다.


여러 직종을 거치며 일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 중 가장 큰 하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상황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처 받고 힘들었던 경험들까지 모두 합쳐져 지금 나란 사람의 인성과 가치관의 토대가 되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통해 배운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크고 작은 선택을 내리며 최대한 현명하게 살아간다. 물론 그 와중에 실수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점점 나은 인간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내가 그 일을 겪어봤기 때문에, 혹은 그런 걸 겪은 사람의 얘기와 속내를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어하고 있을 저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을 살며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경험은 훗날 생각보다 큰 선물을 가져다준다. 

인생의 경험치라는 건 힘든 시간을 겪고 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같이 
한 사람의 통찰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준다.

내가 한때 일했던 맨해튼의 바는 노래와 음악을 좋아해서 매일 오는 단골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주일에 6일씩 오는 A라는 손님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가끔 SNS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다. 탄탄한 직업이 있지만 남몰래 평생 가수를 꿈꾸는 그는 주 4~5일씩 일하는 나보다 더 자주 출근도장을 찍었다. 여러모로 그는 우리 직원들만큼 그곳 사정을 안팎으로 잘 아는 손님이었고 종종 밖에서도 다 같이 만나 맛집을 다닐 정도로 친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뉴욕에서도 꽤 알려진 가라오케 바로, 특히 주말에는 손님이 많아 북적북적했는데, 연말에는 단체 회식이 거의 매일 열렸고, 낮에는 초등학생 생일 파티나 스위트 식스틴이라 부르는 16살 생일파티를 하기도 했다. 일하기 전엔 몰랐는데 미국 사람들의 노래 사랑도 어마어마하다. 금요일 밤이면 단골들과 인근 회사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바빴고, 바 앞에는 술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술 취한 손님들은 날카롭고 공격적이어서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이 술을 먼저 받으면 어김없이 한 마디씩 했다. "내가 더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 주문을 먼저 받아?" 또는, "내가 더 먼저 노래를 신청했는데 왜 저 사람 노래가 먼저 나와?" 하며 따지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나는 단골들은 이미 다 알 정도로 "순서와 차례"에 가장 칼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질서가 무너지고, 취객들은 사소한 것에도 불같이 싸움이 붙기 때문에 바쁜 날엔 특히 더 철두철미했다. 음악은 시끄럽고 손님들은 모두 술을 원하고, 다른 스태프들까지 챙겨가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어느 금요일 밤 가장 바쁜 시간대에, 술을 사려고 바 앞을 가득 채우고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온 A가 바 앞에 섰다.


A는 한가한 월요일 밤 텅 빈 바에 할 일도 없이 서있는 나와 시시콜콜 수다를 떠는, 손님을 떠나 친구 같은 존재였는데 그 무리에 서 있는 A는 "나 여기 단골이잖아. 내 주문 먼저 받아줘야지."라는 듯 웃지도 않고 정색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겠으면서도, 철저히 먼저 온 순서대로 주문을 받으라고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원칙적으로 일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예외를 바라고 있는 게 야속했다. 


그에게 먼저 줘버리면 그 옆의 손님이 틀림없이 불평하며 따질 거고 그럼 내가 곤란해질 상황인걸 뻔히 알면서. 가만히 기다리면 내가 눈치껏 편의를 봐줬을 텐데. 짧은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친한 두 사람의 입장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해서 부탁하는 일이 상대에게 어떻게 느껴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내가 손님이어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입장의 차이다. 난 단골이고 여기 직원들하고도 친하고 이렇게 새 손님들도 데려왔는데 내 주문 좀 먼저 받아주지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날 그의 반대편 입장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아마 어디 가서 손님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의 곤란한 입장을 알면서도(혹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를 내세우며 부담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혹시 나는 그런 적이 없었나 되짚어 봤다. 친하니까 내 편의를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 분명 살면서 한두 번쯤은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입장에 서보면서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도록 배워가는 게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전단지 돌리는 알바는 해본 적이 없다. 사실 미국에서는 전단지를 받는 일이 흔하지 않은데 한국에만 가면 어딜 가도 전단지를 많이 돌린다. 어차피 보지도 않을 전단지를 나눠주는 마케팅 방식이 이해가 안 가고, 받아서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데 귀찮고 의미 없게 느껴져서 전단지는 늘 피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며 살았다.


지난주에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에 가는데 지하철 역 앞에서 남학생이 전단지를 한 뭉치 들고는 쭈뼛쭈뼛해하고 있었다. 덩치는 어른만큼 큰데 얼굴은 딱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히스패닉계 남자애였다. 일 경험이 전혀 없이 얼떨결에 나온 듯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 앞을 휙휙 지나가고 그는 어쩔 줄 몰라하고 서 있었다. 나눠줄 종이는 전화번호부 두께만큼인데 이제 겨우 몇 장 나눠주기 시작한 듯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엔 땀이 줄줄 흘렀고 날씨는 더운 데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의 몇 미터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을 읽은 것 같은 몇몇 사람들이 그가 어색하게 내밀고 있는 전단지에 손을 뻗어 받아갔다. 그러자 그 뒤에 역에서 나오던 사람들도 손을 뻗어 하나둘씩 받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전단지는 별로 쓸모가 없는데, 저렇게 손을 뻗어 일부러 받아가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다들 그 학생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걸까? 나도 일부러 그의 옆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날 발견하고 기쁘게 건넨 전단지를 받아 가방에 넣고 길을 건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마음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일까.

나도 한국에서 스무 살쯤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알바를 했을 때 딱 그 전단지 남학생처럼 쭈뼛쭈뼛했었다. 숫기라곤 1도 없고 말도 없고 내성적인 내가 얼떨결에 친구 소개로 커피 원두 매장에서 일했는데, 난 커피는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때는 지금처럼 남녀노소 커피를 마시던 때도 아니었다. 


뭘 파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서 있는데 손님들이 들어와서 이 원두는 뭐고 저 원두는 뭐고 블루마운틴이며 다크 로스트며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데, 정말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얼른 집에 가고만 싶은 마음뿐이었다. 


입구에 서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만 하고 있었는데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굳이 다가오시며 "학생이 수고하네", "고마워요", "수고해요"라고 살갑게 건네는 한마디가 참 따뜻하고 힘이 됐다. 그분들도 내가 그 전단지 남학생을 보고 느낀 걸 느끼셨을 거다. 그런 인생의 선배님들이 말을 걸어주고 다가와 주셔서 나는 무사히 맡은 기간 알바를 끝낼 수 있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 


지하철역에서 멀어진 후 꺼내서 보니 동네 안경원의 할인 전단지였다. 가족들의 안경을 다 바꾸면 크게 할인을 해준다는, 내겐 전혀 1도 필요가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그 학생이 내가 예전에 느꼈던 어른들의 따뜻함을 조금이나마 느꼈기를. 어색하고 어려운 첫 알바에서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어서 일당 잘 받아 갔길 바랐다


한국에서도 나랑 어딜 가면 늘 할머니들이 주는 전단지를 다 받는 친구가 있었다. 난 그걸 보며 "그걸 왜 다 받아, 그냥 눈 마주치지 말고 피해. 그런 걸 받아주니까 저런 마케팅을 하는 거야." 라며 혼자 똑똑한 척 입찬소리를 하곤 했다. 그걸 다 나눠줘야 일당을 받고, 사람들이 안 받아줄수록 오래 서 있어야 하는 반대편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말이었다. 삼십 대의 나는 좀 귀찮더라도 전단지를 받아주는 아주 사소한 마음 정도는 갖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평하게도 세상은 딱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인다. 더 넓게, 깊게 보고 싶지만알아가는 데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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