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성 찾기
이번 주말, (또 쓸데없이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왠지 방이 더러운 것 같다는 생각에) 방을 청소하다가,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쳤다. 20년 뒤 무엇이 되어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판사가 되어있을지도...'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니, 그땐 판사가 되는 꿈을 꾸었었던 모양이었다.
할 일은 많지만, 언제나 이럴 때 하는 잡생각이 최고 재미있으니까 잠시 추억여행에 빠져보았다. 나는 꿈, 아니, 되고 싶은 '직업'이 정말로 많은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예체능의 길에 들어서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소리꾼'이 될 미래를 꿈꿨고, 의학드라마를 보고 난 뒤에는 '아, 미숙아로 태어난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다 산부인과 선생님 덕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의사가 되는 꿈도 꾸었다. 경찰이셨던 아버지가 해주는 각종 범죄 이야기(라고 쓰고 나쁜 놈들 때려잡기라고 읽는)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의로운 검사나 공정한 판사가 되는 날도 꿈꿨다. 스트레스 풀라고 보내준 로봇과학 학원에서는 걸어 다니는 도마뱀과 센서등이 너무 신기해서 로봇 과학자가 되는 꿈도 꾸었다. 되고 싶은 것도, 뭔가 잘하는 것 같은 것도 참 많았다.
중학교 재학 시절, 처음으로 '적성검사'라는 것을 했다. 보통 문과에 더 맞는지 이과에 더 맞는지 알려주는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고, 성향과 적성에 맞는 미래 직업을 알려주는 이 (고가의) 테스트는 나도 당황하고, 엄마도 당황하고, 하물며 컨설턴트도 처음 본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과나 이과의 그래프는 거의 동률이었고, 예체능, 의대와 법대 세 곳에서 그래프가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테스트 돈만 비싸지 신빙성 없는 것 아닌...?). 이 무슨 이문예 짬뽕의 대환장 파... 아니 대 화합의 장이란 말인가.
(여담이지만 이 테스트에서 나는 '애널리스트'가 90% 확률로 최적의 직업일 거라고, 경영대를 가는 게 좋겠다는 최종 결과지를 받았다. 그러던 나는 주식을 사면 바닥을 치고, 대학원 '투자' 수업에서는 블랙홀에 빠졌으며, 돈 얘기에 눈이 팽팽 도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박사 과정을 두고 방향 설정에 고심하고 있을 때, 답답한 마음에 미국 유학 컨설팅 상담을 받으러 컨설턴트를 찾아갔다. 나의 이력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분은 잠시 고민하더니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수많은 것들 공부하면서 단 한 번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한 적은 없죠?"
뭘 하든 어느 정도는 다 잘하지 않았냐고. 맞았다. 나는 그 어느 분야도 사실 다 '그럭저럭 잘했다.' 경영대에 입학했을 때에도, 회계학 수업에 들어갔다가 '윽, 나랑 진짜 안 맞아'하면서 전과했던 커뮤니케이션도,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선생님으로 일할 땐, 원장님이 '사실 어린애들 가르치는 게 그렇게 잘 맞아 보이지는 않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라면 좀 더 쉬웠을 텐데'라고 하셨지만, 가르치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문화 인류학이나 민속학으로 대부분 가는데, 그 길은 진짜 안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날 찾아온 거잖아요. 진짜 평생 문화재나 들여다보면서 연구실에 박혀 살 수 있겠어요? 내가 보기엔 아닌데."
예체능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공부로 전환했는데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응했던 것은, 노래만큼이나 공부를 그럭저럭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하든, 공부를 하든, 경영을 하든, 문화 정책을 하든,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이 형편없는 성적을 받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열심히 하다 보니 결과가 나오는 사람. 그래서 나의 '적성'이 무엇인지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적성'이라는 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감히 자신했다.
"저는 어느 부서에 들어가고, 어느 직무를 맡게 되나요?"
'적성'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우습게도 '회사원'이 된 이후였다. 해외 시장 조사도 해야 한다고 하고, SNS 계정도 관리하고, 국내 영업팀이 부재중일 땐 물건도 팔고, 미팅도 하고, 번역도 해야 하고, '직무,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의 숨은 뜻을 입사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뭐든지 잘했으니까 이번에도 잘할 수 있겠지 싶었는데, 그것이 거대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메일을 보내달라며 내 책상 위에 쌓이는 불특정 다수의 명함이 마치 어깨를 짓누르는 바위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돌아오는 건 거절일 텐데.' 매 순간마다 시니컬해졌다.
나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부담이 되었다. 소리꾼, 경찰, 의사, 다 이름이 있는데 나는 그냥 '회사원'일뿐이었다 (물론 회사원도 다양한 직무로 나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심리적' 정체성의 부재다). 뭔가 왜인지 '영업직'이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영업이 천직인 것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옆 자리 동료를 보면서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또 깨닫게 되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치 저승사자가 내 이름을 세 번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 떨어졌다. SNS 콘텐츠 관리를 하긴 하지만, 마케터라고 하기도 뭐했다. 하루 대부분 번역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번역가도 아니었다. 도대체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MBA 수업을 들으면서 본인을 '마케터' '회계사'라고 밝히는 동기들을 보면서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팔자에도 없는 다섯 시간의 출퇴근과 35만 원의 교통비까지 내 가면서 얻은 것은 나의 적성에 맞는 직무를 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깨달음과 통장을 통통하게 만드는 것보다 내가 즐거운 일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즐겁지는 않아도, 적어도 내가 할만하다고 느껴지는 일을 해야 그래도 살 수 있겠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