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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MAMBA Jun 11. 2022

'연차', 달콤한 그 이름

병가 없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4년간의 학원 생활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내게 선생 일은 내가 가진 알량한 언어 능력으로 아이들에게 한국을 넘어,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 것들. 파닉스에서, 단어, 단어에서 문장, 문장에서 단락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몰랐다면 알 수 없을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무대를 휩쓸 아이들의 미래에 보기엔 미미해 보여도 탄탄한 초석을 다져주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 기만하다면 지금까지도 선생을 하고 있었겠지. 


선생에서 회사원이 된 후 제일 좋았던 것은 바로 연 15일의 연차였다. 우리 회사는 생일 월에 하루의 휴가를 추가로 주고 있으니, 무려 16일의 연차가 있는 셈이었다. 여름에 5일, 겨울에 (보통 1월 1일이나 크리스마스 하루가 꼭 겹쳐서는 빨간 날 하루를 낀) 5일, 총열흘의 유급 휴가가 있었지만, 학원 특성상 '방학'이라는 명복 하에 선택권 없이 정해지는 날 한꺼번에 쉬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날, 내가 원하는 달, 내가 필요한 때 따위는 없었다. 그냥, 거의 모든 아이들이 8월 초에 휴가를 가니까. 그냥 거의 모든 가족들이 12월 말에 여행을 가니까, 우리도 그때에 맞춰서 방학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학원들은 2-3일이 고작인데, 일주일을 쉰다는 것이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이었다. 그뿐이었다. 

호캉스 가서 반신욕하고 나와 하얀 침대에서 책 읽는 기분은 -- 극락


열흘의 휴가도 파격적인 세상에서 살다가 16일의 연차가 생긴 것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데, 갑자기 몸이 아픈 비상 상황을 대비해, '병가'라는 걸 낼 수 도 있는 모양이었다. 병가라니. 예전엔 (이 기분 마치 '라떼는') 병가라는 것도 없어서 기절하기 직전인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한 뒤, 옆반 선생님이 합반 후 액티비티를 진행해주는 한 시간 동안 아주 잠깐 엎어져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더구나 아이들은 참 많이 아팠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엄마와 아빠도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선생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저 아이에게 감기가 옮았는데, 오늘은 이 아이에게 감기를 옮아서 또 아팠다. 그렇게 안 나오는 목소리도 쥐어 짜내서 억지로, 억지로 수업을 끝내고 퇴근하다가 저도 모르게 열이 올라 펑펑 울기도 했다. 그게 나의 직장 생활이었는데 (이제는 병가가 생겼단다), 병가를 보장해주는 계약이라니. 


3월이 끝나가고 4월을 맞이하던 아직은 찬바람이 불던 이른 봄, 나는 난생처음으로 연차라는 것을 썼다. 3월에 쓰지 않으면 없어지는 생일 휴가와 가족 행사로 인해 반드시 쉬어야만 했던 4월의 첫 날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별 것도 안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평소에는 오후 4시가 되려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었는데, 연차를 쓴 날에는 왜 이렇게 오후 4시가 빨리 찾아오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일에 쉬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특별한 것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엄마랑 쉬고 오라며 집 근처 호텔을 예약해준 오빠 덕분에 반나절 정도 호캉스를 즐겼고, 결혼식 참석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던 것 밖에는 없었는데도 그냥 마냥 좋았다. 연차 날만을 위해 '존버'한다더니, 연차라는 게 이런 거구나, 참 좋다, 웃음이 났다. 


평일 오후에 회사 밖에 있으니 1) 병원 2) 구두 수선 3) 도서관 4) 마당에 물 주기 5) 짐정리를 해도 3시간 밖에 안 걸리더라.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완화로 하늘 길이 조금씩 열리면서 다시 여행 계획을 짜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대열에 합류해 11월 즈음 태국을 가겠노라고 비행기표를 뒤적거려본다. 가을을 제일 좋아라 하는 만큼 한창 더운 7-8월에 휴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괜히 한 번 더 환호성을 질러본다. 으엑, 길어진 아래쪽 눈썹이 또 눈을 찔러 상처가 났다고? 이럴 때면 안 떠지는 눈을 (어차피 눈이 안 보이면 일을 못 한다) 억지로 떠서 회사에 있을 것 없이 우선 급하게 병가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상상도 해 본다. 제때 병원에 가서 바로 안약만 처방받아도 다음 날 눈은 떠지니까 요긴하게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연차, 병가 따위가 뭐라고, 문득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연차는 뭘 하고 보내야 잘 보냈다고 소문이 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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