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고 하든,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우선 그냥 간다.
나는 열정과 아이디어와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으로,
머릿속에는 항상 무슨 일을 배우고 어딜가서 무얼할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칭찬 같겠지만,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나머지 어떤 것도 꾸준히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어떤 것도 잘하는 것이 없고, 어떤 결과물도 내세울 것이 없다.
뭐든지 해 봤다, 배워봤고, 도전해 봤다. 그런데 항상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면 또 다른 것들에 눈이 돌아가서 초보 단계를 넘어서기 전에 이건 아닌가봐 하고 때려쳐 버리는 것이다. 공부건, 운동이건, 취미생활이건 항상 그런 식이다.
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너무 하고 싶어서 시작 해놓고서 막상 시작하면 이게 정말 필요가 있을까? 내가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이 시간을 더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항상 마음이 급하다. 빨리 이 레벨을 넘어가 마스터 하고 다른 걸 해야 하는데, 이 진도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 내 스타일대로라면 하루에 한시간씩 열흘 하는게 아니라 하루에 열시간 하고 끝내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때려치고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간다. 거의 발끝만 댔다가 앗 차거 하고 옮겨버리는 식이다. 나에게는 일년이라는 시간조차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내 짧은 20대에 최대한 많은 것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여기서 한가지 일에 시간을 투자하면서 있을 수가 있어?! 라는 빨리빨리 정신으로 옮겨다녔다. (이런 내 성격 상 20대 초반, 성질을 전혀 이기지 못할 때 한 직장에 2년 반을 있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꼬)
꾸준히 하는 것, 끝을 보는 것을 못한다고 항상 엄마에게 지적받긴 했다.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열정 넘치게, 정신없이 20대를 보내고 나니 아니 20대를 지나면서 중요한 것은 절대 빨리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욕심 같아서는 모든 프로젝트를 한달에 하나씩 끝장 내면서 하고 싶은 것 다 잘하는 고수가 되고 싶은데 말야,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더라고.
내 동생은 나와 성향이 정반대다. 본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에 엄청나게 적극적인 성향이 아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해야지 하고 마음 먹으면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내 동생이 일주일에 한번 한시간씩 승마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비웃었다.
가끔 하면 재미는 있겠으나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바쁠 때는 2,3주에 한번 한시간 타는 걸로 얼마나 실력이 늘겠냐고, 얼마나 운동이 되겠냐고.
일주일에 한번 나가는데 횟수가 쌓이고 쌓이니 어느덧 10회가 되고, 20회가 되고, 30회가 되고, 지금은 승마 장비도 조금씩 사고 외승도 나가는 실력이 되어가고 어느덧 소위 '나 말 탈 줄 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헐.
친구와 함께 시작한 취미생활을 한달 하고 내가 별로인 것 같다고 안했을 때, 그냥 묵묵히 일주일에 한두번씩 계속 한 친구는 나중에 연주회도 했다.
동기와 함께 시작했던 알바를 나는 그냥 돈이 되지 않는다고 관뒀을 때, 그냥 했던 동기는 그 분야 전문가가 되었다.
빨리 늘지 않는다, 효과가 없다, 별로인거 같다 라는 말로 나는 항상 여기저기 깔짝거리다가 끝났고(다양한 경험도 경험이긴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취미에도 쓸 것이 없고, 특기에도 쓸 것이 없다. 욕심만 앞서고 실천하지 못한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까나.
그래서 굉장히 좌절하고 자괴감도 많이 들어서 나 자신도 엄청 많이 탓했었다. 이런 나 자신이 싫다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서
무엇이든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조급한 마음이 들지라도,
조금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고,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이 언제나 초조한 열정에 가득차 있던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당연한 거라고.
그러고 보니 한가지 꾸준히 했던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한가지라도 조금 잘하는 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무자막 미드, 영상 보기. 공부를 하려고 본건 아니었는데, 그냥 재미있어서 본게 내 영어실력의 원천이 된 것 같다. 그래도 하나라도 건졌네 나?!!!
한가지 더 깨달은 것은 무언가를 매일매일 꾸준히 하려면 '루틴'을 만들어 습관을 들이는게 정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간표에 따르는 삶이 싫었다. 어차피 시간표대로 살아지지도 않을 거, 괜히 나 자신만 책망하게 만들고 말야. 그렇게 유도리 없이 지루하게, 틀에 짜여진대로 사는 것이 정말 싫어서 나는 시간표를 거부했던 사람이다. 재미있으면 좀 더 놀수도 있고, 공부가 빨리 끝나면 딴 거 할수도 있는 거지, 나는 규칙이 싫어!(참으로 다루기 힘든 성질머리다.)
중고등학교때는, 아니 대학까지, 아니 직장에서까지, 다른 사람들이 정해준 시간표 대로 살기가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시간표대로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 하루 전체를 내가 알아서 채우게 되니, 나의 목표 달성을 위해 나도 모르게 나의 시간표를 짜게 된다.
매일 일어나서 30분은 무조건 네덜란드어 공부하기. 점심먹기 전까지 무조건 글쓰기. 점심먹고 30분은 무조건 우쿨렐레 연습하기. 저녁8시부터 한시간은 무조건 운동하기 같은 것들.
아직까지도 불쑥불쑥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때가 있다.
내가 이거 단어 몇개 외운다고 언제 네덜란드어를 배우겠냐는 말이야. 이건 가망이 없다.
몇번이고 실크 요가 수업을 나갔는데 실력이 느는 느낌이 안든단 말이야. 돈이 아까운게 아닐까.
내가 지금 우쿨렐레 치고 있을 땐가. 이럴 시간에 과외라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
집에서 살면서 가끔 엄마 아빠 눈치 보일때도 있다.
베짱이처럼 속도 좋게 우쿨렐레나 치고 있다고!
그럴때마다 무엇이든, 기본 6개월, 무조건 꾸준히, 를 되뇌면서 나를 다잡는다.
싸락눈이 어느덧 쌓여서 길을 미끄럽게 만드는 것처럼 미미할 지라도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시작이 반이라지만 열정적인 시작은 반에서 끝나버린다.
나머지 절반은 열정의 화려함에 비해서 훨씬 소소하고, 지루하고, 단순해서 더 힘든 길이다.
어쩌면 공부든, 직업이든, 예술이든, 인간관계든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지름길은 없다. 수행의 길만 있을 뿐. 존버의 길만 있을 뿐.
존버는 성공한다!
"누구에게나 일상을 견디는 일이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만각 스님', 황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