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펼쳐내는 로망
쿠알라룸푸르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것이었다. 너무 도시라는 것! 빌딩숲에서 살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은 후회 비슷한 감정도 들었다. 하지만 기어코 찾아냈다. 그보다는 쿠알라룸푸르가 반드시 준비해 놨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계획된 도시 속 계획된 자연.
KLCC 공원 (Kuala Lumpur City Centre Park)
쿠알라룸푸르의 중심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바로 앞에 위치한 도심 속 허파 같은 곳. 6만 여 평의 녹지에는 2000여 종의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있다.
에어컨이 강하게 나오는 몰 안을 돌아다니다가 햇빛 아래 걷고 싶어지면 주저 않고 공원으로 나갔다. 33도의 뜨거운 태양과 습한 공기였지만, 공원의 숲 안으로 들어가면 걸을만해졌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도 있었지만, 러닝을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러닝 풍경이지만, 타국의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은 여전히 신기하고 멋져 보인다. 특히 히잡을 쓰고 달리는 누군가를 봤을 때는 더더욱.
하지만 이 공원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렬히 빼앗은 건 바로 나무였다. 거대한 나무에 가지가 겹겹이 물줄기처럼 내리는! 하늘로 솟은 가지에서 여러 줄기가 땅을 향해 다시 뻗어 내려온다. 심지어 뿌리가 되듯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 그루의 나무 안에 무수한 순환이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듯한 그 줄기는 내 손목과 굵기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손목을 덥석 잡아보고 싶었다.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만히 움켜 잡아보았다. 손바닥 가득 나무줄기가 밀착되던 그 순간! 내 눈이 동그래졌다. 누군가의 맥을 짚은 듯 살아있는 느낌. 저 나무줄기 속 무언가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듯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무와 교감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공원을 산책하는 날들이 쌓여가며 재미난 계획이 떠올랐다. 주말 아침, 아이와 이곳으로 피크닉을 와야겠다고. 캠핑 의자, 돗자리, 도시락 통 이런 건 없지만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공원에는 벤치가 많고, 지난번에 혼자 문득 앉아버린 것처럼 장바구니를 펼쳐 앉아도 되니까. 먹을 건 공원 가는 길에 구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어느 토요일 아침, 아이와 나는 눈 뜨자마자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몰에서 평소 줄 서서 사 먹어야 하는 비프 로띠도 가뿐히 사고, 맞은편 카페에서 커피와 음료도 샀다. 이렇게 피크닉 준비 완료!
공원에 도착해 분수가 잘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스레 솟아오르는 분수를 보며 뜨끈한 로띠를 앙 베어 물었다. 페스트리 같이 바삭한 빵 껍질과 속에 든든히 들어있는 고기가 맛있게 어우러졌다. 화려하게 펼쳐놓은 도시락은 아니었지만 한 손에는 로띠를, 한 손에는 커피와 주스를 나란히 들고 앉아 먹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여행지에서 조식을 먹듯, 소풍 나와 도시락을 먹듯 그 중간 어디쯤에서 우리만의 피크닉을 즐겼다.
별것 아닌 소소한 이 피크닉이 왜 그리도 뿌듯하던지. 한국에서도 날 좋은 계절에 아이와 종종 소풍을 다니곤 했다. 돗자리에 테이블을 펼치고 김밥을 먹던 우리의 일상. 그 일상을 멀리 떨어진 말레이시아에서도 펼쳐봤다는 게 나는 참 좋았다. 외국에서 일상을 보내보는 걸 이토록 사랑하는가 보다, 나란 사람은.
조식을 끝내고 우리는 공원 물놀이터에 갔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고, 발만 담그겠다던 약속은 물 바닥에 철퍼덕 배를 깔고 넘어져버리며 깔깔 웃음 속으로 부서졌다. 햇빛 속에서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나도 그때 아이의 젖은 옷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비명을 지르며 웃어버렸다.
한바탕의 물놀이 후 햇빛 아래 몸을 말리며 공원을 돌았다. 그리고 이끌리듯 그 나무 아래로 향했다. 가지가 물줄기처럼 빛줄기처럼 아래로 내리꽂는 그 나무로.
"와, 정말 신기해!"
"이거는 줄기일까, 뿌리일까?"
나무 아래서 우리는 감탄을 쏟아놓았다. 이어서 아이에게 건네보았다. 내가 해본 그 신비로운 경험을.
"이 나무 한번 잡아볼래?"
아이는 그래도 괜찮냐는 듯이 나를 한번 보더니, 손을 뻗어 위아래로 곧게 뻗은 가지 하나를 잡았다.
"우와!"
아이의 눈이 구슬처럼 더 동그래졌다. '아이도 느꼈구나!' 그랬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아이도 나무속을 흐르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살아있는 무언가를 만졌을 때의 느낌. 누군가의 손목을 잡았을 때의 그 느낌.
신비롭고 궁금한 이 나무의 이름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는데, 검색해 보니 반얀트리(Banyan tree)인 것 같다. 고급 호텔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그 반얀트리! 그리고 줄기인지 뿌리인지 궁금했던 그것은 가지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맞다고 한다. 아래로 뻗어 자라 다시 땅으로 들어가고 뿌리가 된단다. 그렇게 줄기와 뿌리가 연결되는 것.
나의 한 달 살기가 그랬다. '이게 여행이야, 일상이야? 관광이야, 소풍이야?' 싶은 그 지점들. 여행이 일상이 되고, 다시 일상이 여행이 되는 순환이었다. 관광객이지만 여유롭게 소풍도 한 번 해보고 싶었고, 그 한 번의 소풍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때 난 더욱 선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낯선 곳에서 좋아하는 일상을 펼치는 일이 이토록 커다란 로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 손으로 실현해 낼 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