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드 러너 (2021.09.25.토) *
몇 년 전, 우리 학교 콘서트콰이어 동아리의 반주자와 지휘자가 모두 남학생들이었던 적이 있다. 지휘자 2명, 반주자 2명이 모두 남학생들이었던 것. 보통 ‘음악’이라고 하면 ‘여성스러움’을 떠올리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동산예고’라는 말과 더불어서, 음악에 관심이 많고 재능 또한 출중한 ‘남학생’들이 많았다는 것, 또 그들이 음악을 전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큰 특징이었는데, 학교의 대표 동아리의 주역들이 모두 남학생들이었다는 것은 기억해 놓을만한 일이었다.
정기연주회에서 블랙 정장을 한, 멋진 그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 아들들을 키워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었고 정말 뿌듯했었다. 피아노는 또 얼마나 잘 치던지!!! ‘쇼팽’류의 아름답고 가녀린 소리보다, 일명 ‘타악기’류에 들어가는 피아노의 특징답게, 거칠고 격하게 다루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피아노를 거의 부실 듯이 쳐대는 타건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래서 남학생들이 치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피아노 소리는 정말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때 반주자 중의 한 명이 우리 반 회장 S였다. 학교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와 강한 인상으로 처음에는 모두들 나를 무서워하는 것이 나에게도 익숙한 일인데, S는 2월 말 신입생 OT 첫 만남 때부터 나를 잘 따르고 심지어 장난까지 하며 나를 웃게 만들었던 활발한 녀석으로 내 눈에 확 들어왔다. S는 누가 보아도 막내 같은 거침없음과 활발함으로 학급에서 친숙한 리더십을 보여주어, 3월 첫 주에 학급 임원 선거에서 당당히 회장이 되었다.
늦게 본 막내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부녀회장 같으신 어머님조차 학부모와 일정 거리를 두는 나의 마음을 무너트릴 정도로 사교성이 풍부하신 분이셨다. 마치 나를 딸을 대하는 것처럼 애정과 관심을 듬뿍 주셨고 심지어 S의 아버지까지도 나를 일일이 챙겨주셨다. 사실 그래서, S를 더 잘 챙겨주지 못했던 것 같다. 편애를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는 있다...
명문고에 들어올 정도로 공부도 잘했던 S는, 특이하게도 중학교 3학년 때까지도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놀랐었는데, 피아노 실력도 굉장히 뛰어났다. 학급 임원 선거가 끝난 뒤 동아리를 고르는데 콘서트콰이어 반주자에 지원을 했다는 말에 나는 고민을 했고,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본 뒤에는 더 고민을 했다. 뽑을 수 밖에 없는 뛰어난 실력의 피아노 반주자이어서 당연히 욕심이 나는데, 하필 우리 반의 회장이라니.......
내 고민의 이유는 2가지였는데, 학급 회장이 주된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학급 활동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과, 또 반주자라는 일을 하면서 나를 가까이 접하게 되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맞았다...무척 아쉽게도.....
대학교 때 혼성합창단에서 내가 겪었던 음악에의 황홀함을, 이 녀석도 혹독하게 겪었던 것. 콘서트콰이어의 반주자 활동에 그야말고 푹 빠져서 내가 바라는 학급 회장 일을 생각보다 잘하지 못했다. 거기에 학급 담임으로서는 나름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엄마같은 내 모습과, 콘서트콰이어 음악 지도 교사로서의 까다롭고 소리 박박 질러대는 마녀같은 내 모습 사이에서, S는 혼란스러워했고 힘들어했다.........그리고 나도 힘들었다. 휴.....
학급 회장으로서 다독이면서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지, 음악적인 면을 완벽하게 잘 나타내도록 까다롭게 해야 하는지, 매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학급에서랑 동아리에서랑 변화하는 나의 모습을, 같은 녀석에게 보이려니 힘들었고.... 같은 학급 아이였지만, 그냥 동아리 부원과 학급 일원이었던 H와 달리, 모두 리더로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S에게는 더 까탈스럽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S와 상담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 S~~~ 네가 차라리 콘서트콰이어 반주자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어.... 그럼 내가 더 따뜻하게 해 주었을텐데..
- 아니면, 네가 반주자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어... 그냥 단원이었으면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을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도 훠얼씬 더 성숙했던 S는, 이런 나를 잘 견디어 주었고, 3년 내내 잘 따랐으며, 졸업하고 재수, 입학, 더 좋은 학교를 위해 다시 삼수하면서까지 매번 연락하고 찾아오고 했었다. 그 녀석이 졸업을 하고 나니 내 마음이 더 애잔해졌다. 그리운 S.....
S에게 이런 이야기도 했다.
- 선생님은 강하게 교육시키는 사람이야.. 친절하게 일일이 챙겨주지는 않아.. 가이드만 해 주고 네가 직접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아주고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야..
사실 이것이 내 교육방법이다. 아이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게 목표를 정해두어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조카들이 무언가 해 달라고 나를 찾을 때도 살짝 처음만 해 주고 직접 하게 한다거나, 방법을 보여주고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아 직접 하게끔 한다. 어려움을 직접 해결해 나가도록 옆에 있어 줄 뿐이고, 잘 안되더라도 직접 해 주지 않는다.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옆에서 지켜 보아주고 함께 해 준다는 것.......
그래서 학생의 일로 학교에 이런저런 연락을 하거나 민원을 넣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학생이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학생이 해결해야 하는 일인데 그 사이에 어른이 개입하게 되면, 대부분, 학생에게는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혼자 내버려 두어도 스스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또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 필요가 있다.
패럴림픽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도와 무사히 경기를 마칠 수 있도록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치르는 방식을 일컫는 가이드 러너(Guide Runner)라는 말이 있다. 하계 패럴림픽의 육상, 동계 패럴림픽의 알파인 스키, 노르딕 스키 종목에서 시각 장애인 선수들의 시각장애 등급에 따라 가이드가 함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나누어진다.
전맹(all blind) 선수가 참가하는 T11 종목은 가이드 러너가 시각 장애인 선수와 하나의 줄로 연결하여 경기 진행을 도와주며 함께 뛰지만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경기력에 변화을 주는 행동은 할 수 없다. 결승점을 통과할 때도 가이드가 먼저 들어가면 안되고, 경기 중에도 가이드는 선수들보다 50cm 이상 앞서 나가서도 안된다. 가이드 러너가 부정 출발하거나 선수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면 해당 선수는 실격 처분을 받는다.
특히 멀리뛰기 경기에서 가이드 러너는 선수와 함께 뛸 수 없기에 선수가 도움닫기 및 발구름판을 올바로 밟을 수 있도록 미리 약속한 말로 도움을 주기 위해 선수의 동작을 놓쳐서는 안되는데, 그래서 경기가 끝나면 다른 가이드 러너들보다 훨씬 피로감이 높다고 한다.
장애인 선수들의 기량을 살리고 이끌기 위해서 가이드 러너들도 열심히 운동을 하며, 경기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 3등까지 가이드 러너도 시상대에 올라가 메달을 시상하게 된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장애인 선수의 가이드 러너를 향한 무한 신뢰가 기본이다...
2021년 9월 2일, 도쿄 패럴림픽 여자 육상 200m T11 예선 4조 경기에서 전체 15명 중 14위로 탈락한 세메두에게, 11년 동안 가이드 러너로 함께 했던 바스다베이가가 경기장 프로포즈를 해서 이슈가 되었다. 세메두 또한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바스다베이가, 가이드 러너를 뽑았다고 한다. 11년 동안 시각장애인 선수를 옆에서 도우면서 함께 했던 것도 놀랍고 서로가 사랑을 느낀 것도 놀랍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시각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이 정말 감동적이다.
개교하는 우리 학교에 처음 왔을 때 간절히 원하던 한가지는, ‘선배 음악교사가 있었으면 좋을텐데‘ 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나에게 제로 베이스인 이곳을 채울 무엇을 결정하라고 하니 정말 힘들었다. 하라는대로 하면 잘 따라할텐데 그것을 직접 만들어가야 하다니.....
앞이 잘 안보여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불안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내 발걸음 옆에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가이드 러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무언가 할 때 옆에서 지켜보아 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해 주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잡아당겨서 제대로 컨트롤 해주고...
혹시, 여러분 옆에는 가이드 러너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