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부부의 육아휴직기
사내커플로 만나 결혼했다. 회사에 유독 사내커플, 사내부부가 많다. 밤이고 주말이고 24시간 중 4시간을 제외하고 라이브로 생생하게 돌아가는 유통사가 근무지라 그런지 다들 회사 안에서 제 짝은 만나는 건가 싶다. 남편이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니 신원은 보장됐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우리는 서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 둘 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고 한 직장에 쭉 몸을 담고 있다.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근무한지 6년차인 박대리, 나는 3년차 장사원 이었다. 꼬박 만 2년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 결혼한지 3년 후 아이가 생길 때 즈음엔 박차장, 장과장이자 둘 다 팀장 바로 밑 매니저가 되었다. 그도 나도 꽤 빠른 편이었다. 일 한지 8년차가 되던 해 10월, 나는 처음으로 달리던 열차에서 내려 출산 전 휴가 및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나도 남편도 가족도 회사 동료들도 누구 하나 발톱의 떼만큼의 의심도 없이 육아휴직은 여성인 나의 몫이었다. 회사가 주는 육아휴직은 최대 2년이다. 유급 1년과 무급 1년. 남성에게는 아이 출생 후 1년 이내 한 달간의 휴직이 주어진다. 물론 최대 2년의 육아휴직도 쓸 수 있으나 지금껏 사용한 사람은 1,000여명의 직원 중 단 한 명으로 내가 육아휴직 들어간 후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신생아가 아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를 위한 9개월 간의 휴직이었다.
분명 아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째서 육아와 육아휴직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 되었을까? 물론 출산휴가만 사용하거나 아이 백일 전에 복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경우 남성이 여성대신 육아휴직으로 아이를 돌보는 게 아닌 조부모님이나 시터분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좋지만은 않다. 나 역시도 출산 후 한두 달 만에 복직하는 동료를 보며 ‘독하다, 애가 걱정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 남성과 조부모님 세대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내 경우 육아휴직을 전적으로 나의 몫으로 받아들였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엄마 역시 그렇게 살아왔고 주위 사람들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모두가 해왔던 일이기에 당연했다. 부끄럽지만 의심 하지 못했다. 엄마는 평생 일하면서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힘들었을 법도 한데 나를 세뇌시켰다. ‘아이 세 돌까지는 엄마가 키워야지’라고 말이다. 내가 돌 지난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기고 일찍 복직을 하려고 할 때 가장 말렸던 것도 엄마였다. 결국 난 1년 반을 휴직하는 도중에 둘째를 임신하게 되어 3년째 육아휴직 중에 있다.
자궁과 탯줄을 운운하며 임신과 출산으로 아이와 밀접하게 연결된 자가 엄마이기 때문에 육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거라면 이건 불공평한 설계라고, 잘못됐다고 울부짖고 싶다. 단지 모유수유 때문에 엄마가 아이를 떠안아야 하는 거라면 왜 모유수유가 끝난 뒤에도 주 양육자이자 아이 보육 및 교육의 책임자는 엄마여야 하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회 구조이자 유교 사상에 따른 관습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즘 세상이 조금은 변했기에 일한다고 육아와 살림을 등한시하는 남자들은 주변에서 질타 받기 십상이지만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은 아직도 도처에 깔려있다. 친정엄마만 해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즘 남자들 너무 불쌍하다고. 밖에서 일하고 집에와서도 일한다고 말이다. 참고로 엄마에겐 아들이 없다. 딸 하나다.
나는 남편에게 육아와 살림은 남자가 여자를 돕는 게 아니라 함께 해야 할 일이라고 누누이 얘기했지만 육아휴직 후 불편한 진실들을 수시로 마주해야만 했다. 하루 중 가장 지쳤을 때는 저녁 7시 남편이 정시 퇴근을 했을 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었고, 가장 억울했을 때는 아침 7시 남편의 출근하는 뒷모습을 바라봤을 때였다. 똑같이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했던 나는 아이의 생체리듬에 모든걸 맞추며 180도 세상이 바뀌었는데 남편의 세상은 바뀐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남편에게 난 일하지 않는 사람, 아이 보고 살림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내가 너무 힘들다며 주말에 외출을 하려고 하면 남편은 ‘나도 일하잖아’라고 말했다. 그도 주말에 쉬고 싶다는 얘기였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 역시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눈치를 은연 중에 보게 되었다. 육아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알 리가 없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이해시킬 방도가 없는데 반나절, 하루 보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섯 달이고 해봐야 알 노릇이다.
내가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남편은 일을 하고 있으니 우리는 둘 다 각자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걸까? 그 자리는 애초에 어떻게 정해진 걸까? 나는 분명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남편만 그대로일까? 분명 아이는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남편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책임을 지기 위해 누군가는 일을 쉬는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게 나였을 뿐이다. 내가 휴직자가 아닌 퇴사자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부부는 둘 다 노동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노동은 눈에 보이고 월급이라는 보상이 있지만 다른 누군가의 노동은 정 반대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티도 나지 않으며 끝이 없는 no 보상제다. 아이들이 커가는 성장? 행복감? 그건 나의 보상이 아니다. 부부 둘 다에게 주는 선물인 것이다.
부부 중 육아휴직을 하는 이가 엄마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사회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책임을 한껏 더 껴안은 사람에게는 그 가치를 인정해줘야 하고 혼자서 돈을 벌게 된 사람에게는 격려와 용기를 줘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 억울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육아 생활에서, 사회적으로 변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적극적인 동참은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덜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남편이 백신 주사를 맞기 위해 이틀 연차를 냈고 나 역시 둘째 5개월 만에 연차를 선언했다. 다툼도 있었고 눈물 콧물 쏙 빼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밖으로 나간다. 내가 육아에 쏟아낸 시간을 나 역시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토닥여주기 위해 내 시간을 만들어 내본다.
아빠의 육아휴직도 어제보다 오늘 더 늘어나 우리 자식들은 엄마가 육아휴직을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육아휴직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