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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Jul 15. 2018

맥주

2018. 07.14에서 15 사이

 

필름이 끊겼다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인 적이 없다.

나는 살면서 필름이 끊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느낌인지, 어떤 기분인지 솔직히 모른다.

어쩌면 필름이 끊겨서 기억에 없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소리나 해대는 이유는 다 폭염 때문이다.

폭염에 녹아버린 잠이 더는 날 찾아오지 않는다. 이 밤, 차가운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첫술은 도둑질이었다.

깊은 밤, 친구들을 가게로 불러 호기롭게 제안을 한다.


"우리 술 마실래?"


 물론 이건 누가 먼저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제안이 있었으니 일이 진행되었으리라. 아무래도 '나'라고 해야겠지. 가게 안쪽에 담가 두었던 레몬 소주가 투명한 병에 담겨 나오고, 칸막이가 쳐진 4인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도둑 술을 마셨다. 몇 살인지 말하지 않을 테다. 어떤 화학 작용도 하지 못할 만큼 먹는 '척'만 했으니 첫술이라기엔 어쩐지 좀 싱거운 기억이다.  어릴 때 마신 술은 친구들 사이의 '존재 확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알게 된 술과 나에 대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혀본다.


난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뚱이를 갖고 태어났다 것과 소주에서 아세톤 맛이 난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처음 갔던 포장마차는 생각보다 안주가 비싸고 불편했으며 종종 엄마 옷에서는 맥주 냄새가 났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을 싫어한다. 


매번 술로 실수한 기억을 잊지 않고 등에 지고 사는 한 마리 낙타 같은 사람이다. 


기분이 나쁘거나 긴장하면 술을 더 많이 마실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술을 잘 마시는 날은 어딘가 꼬여있는 날이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사람이 있는 곳에서 혼자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여름에는 맥주를 좋아하고 겨울에는 와인을 좋아한다. 


양주를 좋아하지만 딱히 스스로 사 먹을 만큼 경제력이 있는 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소주가 입에 붙는 날이 있고 안 붙는 날이 있는 데 그 이유를 여전히 모른다.




날이 더워질수록 쨍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

무엇이 간절해지는 건 지금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의 허기다.

그래서 

술 마시자는 말은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고,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술 마시자는 말은 시간을 건너 삶의 한 부분을 공유하겠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잊어버리겠다는 외로움이다.


 밤이 되어도 낮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단단한 기억이 폭염에 흐물흐물 녹아나면, 시리도록 차가운 맥주가 간절하다. 서리 낀 투명한 잔, 가득 담긴 청량함이 내 방을 휘적휘적 걷고 있다.

미치겠다.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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