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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는 것과 부스러지는 것

#698

by 조현두

비가 막 그친 길 위
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등에 있어야 할 집은
보이지 않았고
물기 어린 몸만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미는 쪽에 가까웠다
길이 생기기 전에
흔적이 먼저 남았다

젖은 선 하나가
아무 소리 없이 이어졌고
그 끝에서
작은 빛이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이미 부스러졌고
어떤 부분은
아직 녹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에
방향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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