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
빛바랜 꽃은
오래전 잃어버린 마음을
가엽게 품고 있다
색을 잃은 것은 계절이 아니라
기다림이었고
향을 잃은 것은 꽃이 아니라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수십 번의 상처를
접어 안고서도
사랑이라 믿었던 시간들은
이미 지나간 해의 달력처럼
손끝에서 바스러졌다
그럼에도
뿌리는 땅을 떠나지 않았다
버려진 줄 알면서도
빛이 오기를
한 번쯤은 더 믿어보았다
만약 다시
봄볕이 문지방까지 들어온다면
나는 서두르지 않고
너를 위한 자리부터 고르겠다
화려하지 않아도
다시 꺾이지 않아도 되는
조용히 피어
오래 남아 있을 꽃
그 이름을
아직은 말하지 않겠다
다만
피울 수 있다면
이번에는
너를 향해
피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