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감사함, 그리움, 사랑

#782

by 조현두

오늘도 내 속뜰에는 차마 다 내보이지 못한 부끄러움이 가시 돋친 넝쿨처럼 웅성거리며 자라납니다. 예전에는 이 마음이 그저 숨기고 싶은 치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겠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은 내 안의 정직한 눈이 아직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는 기척이며, 굽어가는 생의 궤적을 긍정의 결로 돌려세우는 가장 뜨겁고도 시릿한 내 영혼의 맥박이었음을 말입니다.


그 시린 거울 앞에 서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기처럼 내 곁을 흐르던 이들의 당연한 온기와 식탁 위 김 모락거리는 밥 한 그릇에 담긴 지극한 우주를요. 내 허물을 들여다보는 그 낮은 마음의 틈새로 비로소 고맙다는 말들이 옹골찬 낟알이 되어 차오릅니다. 당연한 것을 기적으로 받아 적는 이 겸허한 필사야말로, 부끄러움을 아는 자만이 얻는 눈부신 혜안임을 나는 믿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그리움의 옹이가 되어 가슴을 찔러와도 나는 그 투박한 마디들을 다정한 손길로 쓸어주려 합니다. 그리움은 멈춘 자의 미련이 아니라, 내가 생의 골짜기를 성실히 건너왔다는 묵직한 증명이니까요.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이 삶의 책장에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그 엄정한 사실을. 아무리 비루하고 아픈 구절일지라도 제때에 정직한 마침표를 찍어 문장을 매듭짓는 단정함을 지키겠습니다.


마침표란 도망치지 않고 내 생을 책임지겠다는 준엄한 약속이며, 그 마디를 단단히 여며야만 비로소 다음 행의 첫 글자를 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거울 속의 허상 같은 '나'를 사랑하려 애쓰기보다, 내가 온몸으로 비벼대며 살아온 이 투박한 '삶' 자체를 사랑하려 합니다. 부끄러움과 감사와 그리움을 짓이겨 만든 진한 잉크로 오직 내 손으로 꾹꾹 눌러 찍는 그 정갈한 마침표 하나. 자신이 아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한 끝에 번지는 그 짙은 마침표의 향기를 믿으며, 나는 나의 생을 뚜벅뚜벅 적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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