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그릇

by 조현두

방금, 깎아 만든 훌륭한 그릇이 있었다

결은 보드랍고 가볍되 그리 무르지 않고 단단하며

고고하지는 않지만 그리 천박하지도 않으며

잔이 되기도 하고 그릇이 되기도 할 만한 크기를 가진 그릇

그 윤곽은 어찌나 고혹적인 것인가


다만 그릇이 되지 못한 것들

그 먼지 같은 것들이 이 시가 되었다

그 먼지들이 모여 내가 되었다

정말로 나는

아이고야 그 먼지들이 모여 있는 순간

정말로 내가 나 일 수 있는 긴 순간

나는 먼지로 만든 그릇이구나

이 시는 그릇이 되지 못한 먼지고


그러고 보니 목주름은 언제부터 이리 깊어진 건지

이건 뭐 여길 자르란 표시 같구먼

생각은 깊어졌나

감정은 깊어졌나

깊어진 목주름에 먼지라도 껴두란건가


뭐 그래도 사랑이라도 깊어졌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배꼽이라도 목주름만큼 깊어졌다면 또 그게 어딜까

배꼽이 그릇이겠거니

먼지를 담을 그릇이겠거니

거기에 시가 담기겠거니

매거진의 이전글아팠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