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던 소중한 인연들과의 단톡방에서 나왔다.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고, 나에게 친절하기 위함이었다.
상실, 슬픔의 과정 전에 분노부터 올라왔다.
너 때문이야.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가 나빴어.
인정하고 나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무 성급했어. 내가 나빴어.
각자가 바라보는 사실을 바탕으로 고유한 선택을 했음에 불과하지만, 난 그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어 보려고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특정 지어 보고 싶었다.
상실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짓는 것. 서로가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짓는 것'은 분노의 감정을 터뜨리기에 용이하다. 게다가 자기 합리화라는 달콤함까지 가져갈 수 있다. 나를 향한 분노이든, 타인을 향한 분노이든 분리의 프레임은 상황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힘을 가졌다. 상대가 잘못했든, 내가 잘못했든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이 관점으로 해석해버리기 시작하면, 살면서 같은 문제에 부딪혀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뭔가 더 나아질 개선책을 찾기보다,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기 쉽다. 당장의 격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지만, 진정한 나를 위한 선택으로 바라보기엔 무리가 있다.
'서로가 다름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장 나 자신에게 혹독하다. 터져 나오는 피해의식을 흘려버리고, 나와 상대를 객관적인 개체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선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를 바라보아야 하고, 타인을 나쁜 인간으로 포장하여 합리화시키고픈 마음 또한 들여다보아야 한다. 반대로, 상대를 선한 인간으로 포장하고, 나를 나쁜 인간으로 포장하여 스스로를 학대하며 죄책감을 덜어내고픈 마음 또한 들여다보아야 한다. 결국 남는 것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