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송인 Dec 31. 2020

SELF-HATE AND SELF-CONTEMPT 2

Neurosis and Human Growth(pp. 130-141)


자기혐오의 세 번째 표현형은 자기경멸입니다. 앞서 설명한 자기비난과 구별이 어렵지만, 자기경멸에서는 향상이나 성취를 향한 어떤 분투라도 저지된다는 데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자연스레 자신감 발달이나 회복에 치명적이고요. 자기경멸이 외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더라도 본인이 이를 자각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안 된다는 언급이 중요해 보여요. 


자기경멸의 네 가지 결과로서 1)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계속 깎아 내리게 됩니다. 2) 자기를 믿지 못 하는 만큼 타인도 믿을 수 없게 되면서 대인관계가 저해됩니다.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할 거라 생각하고 심지어 치료자도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경멸보단 타인이 나를 경멸하는 게 덜 아프기 때문에 자기보호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3) 자기존중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피학적 양상이 우세해집니다. 특히 병적인 의존관계에 매여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4) 스스로 자기 기를 꺾어버리는 방식으로 행동하는데(즉, active self-frustration), 특히 즐거움을 향유할 수 없게 하고, 이는 진짜 자기의 관심이나 흥미에 연원하는 소망/행동을 함으로써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의나 존중, 감사, 사랑 등을 통해서 자기경멸을 완화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데 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롯한 외부 평가에 따라 자기 평가의 부침이 있다 보니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외부 평가라는 것도 도달할 수 없는 스스로의 이상적 이미지를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지닌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한 자기경멸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기경멸의 빈번한 두 테마는 외적 매력과 지성입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성격에 따라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분투하거나 정반대로 자기를 방치하거나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식의 양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분투한다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목표로 놓기 때문에 자기경멸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가 지닌 취약성과 한계를 수용하지 못 한 결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황량한 자기혐오의 지옥이 펼쳐지는 모습이 슬플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는 완벽한 이상을 선물해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인간 육신의 한계를 온전히 경험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생에 이룩했지만 때때로 인간은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악마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지옥을 창조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레너드 코헨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깨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는 가사는 어디선가 한 번쯤 보셨을 텐데요. 수련 받을 때 제 컴퓨터 모니터에 늘 붙어 있던 문구이기도 한데, 연말에 유독 이 문구가 떠오르네요. 자기 한계를 모르는 이는 불행합니다. 자기 한계를 보지 않기 위해 다양한 갑옷을 두른 채 모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서글프게 느껴지는 챕터였습니다.



이전 09화 SELF-HATE AND SELF-CONTEMPT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