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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May 05. 2023

아바타를 위하여 5

5장

"그 시나리오 곧 천만 영화 되는 거야?"


기대에 차 까맣게 커지는 K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비로소 그가 학교를 그만두면서 했던 말들이 어렴풋이 떠 올랐다. 그는 독일로 유학을 가서 진정한 표현주의의 정수를 배워 오겠다고 했었다. 물론, 엄마를 설득하는 일이 어렵다는 토를 달았지만. 그 모든 게 벌써 오 년 전의 일이 돼 버렸다. K는 정말로 독일 유학을 마치고 온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에게선 영화인들에게서 풍기는 어떤 분위기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천만 영화? 그런 게 어디 아무한테나 일어나겠어. 나 같은 무명작가에겐 그냥 손익 분기점만 넘는 영화 하나 만들 수 있어도 다행이지."

" 왜 너 재능 있잖아. 너 입학할 때 과 수석이었다며. 어디 그뿐이야. 대학 1학년에 당당히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었잖아. 그것도 문학과는 거리가 먼 경제학도가 말이야. 하긴 다 군대 가기 전의 일이지만......"


군대 가기 전의 일이라는 K의 말이 맘에 걸렸지만 나는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아니 대수롭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제대 후 내 대학생활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다방면에서 발휘되었던 재능이 모두 소진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학 강의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찼다. 어쩌면 내 쌍둥이 동생이 내 길운까지 모두 가져가 버렸는지 모른다. 이런 내 사정을 K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그에게 내 처지를 모두 고백해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마치 포우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 속 주인공이 경찰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듯이 말이다. 시나리오가 번번이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내 생계를 책임져 주던 여자가 떠났음을, 요금을 내지 않아 전기와 가스가 곧 끊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 K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끝 모를 나락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내 운명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이. 


일 년 남짓 버텨 온 인턴사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었을 때, 내 미래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처음 얼마 동안은 막막한 생활을 헤쳐나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었다. 자동차 세일즈, 보험 설계사, 지하철 불법 판매원과 학원 강사. 문제는 그 어떤 일도 석 달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는 거다. 내 기대치에 턱없이 못 미치는 삶의 질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잔뜩 불만에 차 있을 때 여자를 하나 만났다. 돌이켜보면 여자를 만난 게 내게는 마지막 행운이었던 거 같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내 거짓말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여자는 내 생활을 기꺼이 책임져 주었다. 여자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시나리오만 쓸 수 있다면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었다. 새벽녘 술에 잔뜩 취해온 여자의 사타구니에서 정액 냄새가 흘러나와도 질투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내 생계만 책임져 주면 그만이었다. 


우리 사이에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먹고살 걱정이 없다는 K의 말 탓일까, 내 눈에는 그가 성공한 벤처 사업가쯤으로 보였다. 불어난 몸 때문이지, 어딘가 좀 어색해 보이는 걸 빼곤 어딜 보나 현실에 완벽하게 적응해 살아가는 주류처럼 보였다. K가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은 내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탓이리라. 


"결혼은?"


결혼. 나와 그 여자와의 관계를 결혼이라 부를 수 있었나. 몇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았다면 결혼이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여자는 있었어. 얼마 전에 헤어졌지만."

"저런, 왜?"

"사법 고시 준비한다는 거짓말이 들통나서? 아님 내 시나리오가 구려서? 암튼 내 시나리오를 발견한 다음 날 떠났어."


여자가 떠난 후로 내 생활은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 버려서 이별의 상처 같은 걸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 늘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던 방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어질러졌고, 이런저런 세금을 독촉하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왔다. 여자가 떠난 처음 얼마 동안은 양말 한 짝, 팬티 하나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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