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너는?"
"나? 당연히 안 했지. 엄마가 뜨신 밥 해 주겠다. 깨끗이 빨래해 주겠다. 뭐가 아쉬워서 결혼을 하냐? 요즘 같은 세상에 가정을 꾸리는 것 자체가 미친 짓 아냐? 생각해 봐.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잖아."
내 눈에 비친 K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근심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는 사람처럼 태평해 보였다. 악운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자의 느긋함이라고나 할까.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하루하루 간당간당 유지해 왔던 내게 그런 그의 모습은 부러움을 안겨줬다. 아니, 자질구레한 일상을 책임져 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서 질투심을 끄집어냈다. 밤마다 자기 여자를 낯선 남자의 품으로 내 몰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질투심을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바랬던 것도 사실은 그런 거였나 보다. 세금 영수증이 나오면 알아서 해결해 주고, 돈이 떨어지면 알아서 용돈을 건네주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책임져주는 그런 거 말이다.
지금쯤이면 K도 내 상황을 대충 눈치챘을 거다. 어쩌면 나를 현실에서 낙오된 몽상가라고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른이란 나이는 불확실한 재능을 걸고 모험을 하기엔 너무 위험한 나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현실에 안착하도록 놔두질 않았다. 나름 명문대를 졸업했건만 내게는 시한부 인턴사원의 자리밖에 주어지질 않았다. 몇 차례 취업의 높은 벽에 부딪친 후, 나는 스무 살 무렵 나를 처음 매료시켰던 영화에 대한 향수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무료하게 병뚜껑만 찌그러트리던 K가 갑자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 왔다. 그런 그의 시선은 왠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넌 그래서 지금 뭐 하는데. 영화감독은, 어떻게 됐어? 독일로 유학 간다고 학교 그만뒀잖아."
K는 여태 그 얘길 기억하고 있는 내가 우습다는 듯 한참을 키득거렸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난 그냥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졌을 뿐이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말이야.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처럼."
반 남짓 담긴 맥주잔을 나는 단숨에 들이켰다. 김이 다 빠진 맥주 탓인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떨떠름했다.
"이게 내 연락처야. 뭐,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다. 많이 궁급했어 난, 대학시절 재능 많던 동기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당황하는 내 모습 따윈 관심 없다는 듯, K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리며 황망히 홀을 빠져나갔다. 그가 건넨 하얀 메모지 위엔 파란 볼펜으로 휘갈겨 쓴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K를 만나고 정확히 사흘 뒤에 전기가 끊겼다. 나는 더 이상 게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깜깜한 방 안에서 언제까지나 시체처럼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대학 동기에게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로 남고 싶은 자존심 따윈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빼줄 때까지 K에게 신세 지기로 마음을 굳혔다.
오후 내내 빈둥거리던 K가 무료했던지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선 며칠 전 같이 본 다큐멘터리에서 지겹게 반복되던 쿠바 노래가 흘러나왔다.
"너 스페인어 잘하지? 왜 일 학년 때 인문대에서 같이 들었잖아."
"자, 잘하긴 뭐. 이젠 하도 오래돼서 다 까먹었다."
스페인어라는 생뚱맞은 소리에 당황한 나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알겠지? 엘 콰르토 데 툴라. 툴라의 방에 불이 났다네. 그걸 지켜보는 소년의 안타까운 마음. 음, 이건 분명 성적인 은유가 담겨 있는 거 같은데."
"어째서 그렇다는 거지?"
내가 너무 생각 없는 질문을 던진 걸까. K는 몹시 무료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내 너머의 누군가를 응시하듯이.
"군대 가기 전의 너라면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
나는 부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얹혀사는 신세라고는 하지만 너무 대 놓고 무시하는 K를 더 이상 못 참겠다. 어제 그가 한 말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볼품 사납게 커다란 가방을 마룻바닥에 집어던진 K는 다짜고짜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논리를 펼쳤다. 시나리오 작업은 잊은 채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끔벅이며 그를 바라봤다.
"화가든 음악가는 진정한 아티스트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끓어오르는 끼를 주체할 수 없는 법이거든.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든 멋진 예술 작품을 쏟아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예술가를 흉내 내는 가짜들은 달라. 어쭙잖게 주워들은 기교를 가지고 억지로 뭔가를 짜내려 하지만, 결국엔 뻔하디 뻔한 작품을 겨우 토해내고 말지."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신랄하게 쏟아내는 그의 논리가 나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내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았다. 어둡게 일그러지고 있는 내 표정을 보았는지 '자아비판'이었다는 사족을 덧붙이며 K는 그쯤에서 논쟁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