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K의 가방이 내 머릿속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그 물건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언제였더라, 빠끔히 열려 있던 지퍼 사이로 언뜻 보였던 갈색 치마와 하얀 브래지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K가 어머니께 가져다 줄 물건을 챙겨 놓은 걸 보고 내가 공연히 호들갑을 떠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에게는 여성들 옷에 집착하는 패티시즘 증상이 정말로 있는 걸까?
K를 다시 만난 건 내 운세가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였다.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이 불확실했기에 나는 미래 따위는 어떻게 굴러가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스물 네 시간으로 나눠진 하루를 온전히 컴퓨터 게임을 하는 일에 쏟아붓고 있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자의 광기였을까. 그렇게 꼬박 삼일을 게임 속에서 헤매 다녔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졸음이나 식욕 같은 인간의 일차적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단 하나, 게임 속 아바타들이 죽을 때 찾아오는 기묘한 희열이었다. 자기 학대라도 하듯 내 분신들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마치 오르가슴에 도달했을 때의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사흘 낮밤을 물로만 끼니를 이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 정신과 육체는 오히려 더 말짱해져 갔다. 마치 죽어 간 아바타들의 에너지를 내가 모조리 흡수해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정말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바타들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게임으로 세월을 축내고 있을 때 느닷없이 K가 나를 다시 현실로 끄집어낸 것이다.
K는 몰라 볼 정도로 살이 불어 있었고 어딘가 좀 불안정해 보였다. 대학시절 매력을 발산하던 미끈한 엉덩이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한 오 년만인가? 동창 찾기 사이트에서 네 전화번호를 찾았어."
연거푸 버드와이저만 들이키던 K가 고맙게도 불편한 침묵을 먼저 깨 주었다. 나는 대화량이 함께 한 시간과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막 하는 중이었다.
"네가 학교를 그만둔 뒤로 못 봤으니, 아마 그럴걸?"
두 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길 K가 했을 때 난 심각하게 받아들이질 않았다. 요즘 대학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 당시는 한두 학기 휴학하고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가는 일이 허다했었다. 더욱이 그 당시엔 민중해방을 외치던 무수한 선배들이 진짜로 민중을 해방시키러 간다며 학교를 떠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시기기도 했었다. 그들 대다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그들은 무사히 졸업을 했고 사회 전반의 중요한 자리들을 모두 꿰찼다. 하지만 여전히 민중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민중을 해방시키는 누군가가 또다시 민중을 지배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선배들처럼 K 역시 다시 복학을 하리라 믿었다. 그 당시 나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취업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어서 더 이상은 K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넌 그대로구나. 난 살 많이 쪘지? 어때, 살이 붙으니까 우리 엄마랑 똑같지 않아? 너 우리 엄마 기억하지?"
"어머니? 당연히 기억하지.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너무 오랜만에 만난 탓일까. 나는 K의 사적인 정보에 대해서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혈액형이 무엇인지, 생일은 언제였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했는지, 특별한 버릇은 뭐였는지 등등. 엄지와 검지로 자주 코끝을 쓰다듬는 동작은 그 시절부터 계속된 습관일까?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나보다 6개월 늦게 군복무를 마친 그와 대학 시절 내내 함께 붙어 다녔다고는 하지만 머리가 굵어져서 만난 관계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래도 K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만은 내 머릿속에 똑똑히 입력되어 있었다.
"먹고살 걱정 안 하니까 몸이 많이 불더라고, 넌 요즘 어떤데?"
K의 물음에 나는 새삼 내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행운은 나와는 전혀 동떨어진 비현실 속의 단어라도 되는 양, 내겐 좀처럼 찾아와 주질 않았다. 아니, 행운은 고사하고 내 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울어져서 급기야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추락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좀 쓰고 있어."
"시나리오라면 영화?"
지방이 많아 두덕두덕 하게 보이는 눈두덩이 사이로 K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대학시절 우리가 함께 보았던 무수한 영화들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이. 나는 담배를 빼어 물었다. 복학 후 K 하고만 어울렸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영화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 수면제라 불리던 교수의 수업을 제끼고 찾아간 독일 문화원에서 관람했던 영화들의 몇몇 장면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서 하얗게 펼쳐졌다.
그 당시 영화에 미쳐 있었던 건 나보다 오히려 K였다. 기면 발작증이 있는 남자가 툭하면 길 위에 쓰러지는 영화를 본 어느 날,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이란 계획과 달리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꿈은 이루어진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 다행히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듯, K가 끔찍이도 아끼던 카메라로 찍은 8mm 영화가 어느 단편 영화제에 입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