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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May 14. 2023

아바타를 위하여 8

8장

녀석이 가방을 들고나가기가 무섭게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K가 저만치 공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공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인적이 드물었다. 킥보드를 타는 몇몇 아이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자의 풍경이 한가롭게 펼쳐졌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온해 보여 공연히 부아가 치밀었다. 

잠시 내 주의를 벗어났던 녀석에게로 눈을 돌렸다. 주변을 몇 차례 둘러보던 녀석이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 여자 화장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곳에 멈춰 서서 잠시 안을 살피던 K가 잽싸게 여자 화장실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더러운 변태 녀석. 혹시 강간범은 아니겠지? 공원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K의 행동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킥보드로 질주하기에 바빴고 여자는 짧은 다리로 신나서 뛰어다니는 개를 쫓느라 정신없었다. 

녀석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화장실 입구가 잘 보이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집에서 가져온 잡지를 꺼내 마치 무슨 첩보 영화에서처럼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잡지에 얼굴을 파묻은 채 힐끗거리면서 녀석이 나오길 기다렸다. 혹여라도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뛰어들 생각으로 바짝 긴장해 있었지만 다행히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진짜 여자는 아직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한참이 지나도 녀석은 나오질 않았다. 

슬슬 조바심이 날 때쯤 기다리던 K 대신 뚱뚱한 중년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덜퍽진 엉덩일 흔들며 걷는 모습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촌스러운 암갈색 통치마가 왠지 친근해 보였지만 딱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실망한 나는 다시 잡지로 눈을 떨궜다. 내 눈에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 들어온 건 잡지 너머로 힐끔거리며 K를 찾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 앞에서 여자가 메고 가는 가방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가방은 K가 늘 신줏단지 모시듯 지니고 다녔던 바로 그 가방이었다. 그럼, 저 중년의 아줌마가 K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여자랑 K의 몸집이 붕어빵처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여자는 오 년 전 보았던 K의 어머니와 꼭 닮아 있었다. 내 머릿속은 마치 실타래가 마구 뒤엉켜 있기나 한 듯 어지러웠다. 내가 꾸물대는 사이 여자가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자를 따라간 곳을 순서대로 되짚어보면 이렇다. 처음 뒤따라 간 곳은 사람들로 벅적대는 J로 사거리 전철역 입구였다. 허름한 가방에서 그보다 더 너덜거리는 담요를 꺼낸 여자는 지상을 향해 뻗어 있는 계단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는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 정도로 납작 엎드려선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바쁘게 오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자의 존재에 별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가끔씩 마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와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들이 가지런히 뻗어 놓은 두 손 위에 지폐나 동전을 던져 주고 갔다. 해질 무렵까지 그렇게 꼼짝 않고 엎드려 있던 여자는 일어나 지하철을 타려는지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가 다음에 도착한 곳은 마치 궁전처럼 으리으리한 풍채를 자랑하는 어느 교회 앞이었다. 저녁 예배가 드려지는지 건물 안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가 우렁찬 걸로 미루어 볼 때, 불황을 타지 않는 직종답게 교회에는 여전히 신도들로 붐비고 있었다. 종교적 선량함으로 치장한 이곳이 어쩌면 동냥질을 하기엔 최적화된 곳이 아닐까. 여자는 교회의 반쯤 열린 정문 앞에서 먼저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 넙죽 엎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예배가 끝나고 교회 마당은 사람들로 출렁이기 시작했다. 신도라는 의무감에서였을까, 아니면 체면 때문일까. 이곳에서의 수입은 제법 짭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전이 아닌 지폐를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돈이 손에 쥐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내 눈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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