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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린 May 14. 2023

아바타를 위하여 9

창문 너머로 따갑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내 단잠을 깨웠다. 뒤숭숭한 꿈으로 밤새 뒤척였던 탓인지 몸이 쑤셔왔다. 여기가 어디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멍멍한 머리를 흔들었다. 잠이 든 새 누군가 내 육체를 마구 난타하고 도망가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다. K는? 닫혀 있는 방문 너머로 녀석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헤집고 지나갔다.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일이었다. 내가 진짜로 꿈을 꾼 걸까. 정말 꿈같은 사건이었다. 가끔 꿈에서 경험한 일을 현실로 착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내가 그런 건 아닌지. 요즘 너무 K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킨 탓에 녀석에 대한 이런 흉측한 꿈을 꾼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가방? 그렇다. 가방을 열어 보면 모든 게 다 밝혀질 거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녀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은 녀석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발끝으로 서서 살금살금 다가가 가방을 집었다. 지퍼가 활짝 열리자 어제 내가 본 여자가 입고 있던 짙은 갈색 치마가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담요, 짧은 파마머리의 가발, 부인용 슬리퍼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전에 본 화장품들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 결에 깼는지 K는 미간에 굵은 주름을 만든 채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지?"


이쯤이면 모든 걸 체념할 때도 되었건만 K는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서 있다. 


"뭐긴, 역할 바꾸기 게임이지.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아는 게임 아냐?"

"뭐라고? 지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분 나쁠 정도로 낮은 녀석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목을 옥죄어 오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우리 엄만 오 년 전에 행방불명되셨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완전히 증발해 버린 거라고. 평생 내 뒷바라지를 해 주던 엄마가 말이야. 엄마가 없는 삶을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내 등록금을 내 준 사람도 매일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던 사람도 모두 엄마였다고. 난 그렇게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영화나 만들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 돼 버렸지. 처음에 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하철에서 불법 복제 테이프를 팔기도 했어. 처음 몇 번은 안면몰수하고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지. 그런데 그게 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하기가 힘들어지더라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승객들을 보고 있자니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치밀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어. 엄마는 그동안 어떻게 날 먹여 살리셨나 몰라.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에 떠올랐어. 엄마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이 말이야. 막상 해보니 그건 생각보다도 훨씬 재밌더라고. 중요한 건 엄마가 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야. 마치 복면만 쓰면 강도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악당들처럼 말이야. 너는 어땠는데?"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 위해 담배를 빼물었다. 등줄기에선 어느덧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어땠다니, 무슨 말을 하는지 난 통 모르겠는데."


K는 아주 재미있는 물건이라도 구경하듯 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녀석의 입가에는 비열한 웃음이 번졌다. 


"어이, 같은 처지끼리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내가 왜 너를 찾아갔는데. 오 년이나 지난 마당에 말이야. 너는 그날, 술자리 이후 모든 이들을 잘도 속여 왔잖아. 물론 나도 처음엔 감쪽같이 속았지만 말이야."


녀석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울려왔다. 


"미친놈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을 나선 나는 뒤에 놓인 문이 마치 K라도 되는 양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등 너머로 '쾅'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처럼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처음에 윙윙되던 소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로 변해선 겹겹이 쌓인 시간을 가르고 이명처럼 박혔다. 


'끼, 이, 익'


내가 뒤돌아섰을 때엔 이미 형은 빨간 스포츠카 아래 깔린 뒤였다. 악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즉사하는 게 형의 운명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로등을 들이받고 멈춘 차에서 폭발하기 전 탈출하려 발버둥 치는 운전자를 보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경찰이 오고 조사가 진행되는 내내 내 머릿속은 밤거리 보다 더 깜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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