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주민등록 번호를 대라는 경찰의 말에 나는 기계적으로 내 주민번호를 불러 주었다. '720517-XXXXXXX' 열 세 자리의 숫자가 우리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줄을 그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작은 그렇게 작은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형의 삶을 동경해 왔었다. 처음에는 단지 그가 먼저 학교를 가게 된 일이 부러웠지만 차츰 그의 재능과 위치, 아버지가 퍼붓는 차별적 사랑까지, 형의 모든 걸 다 부러워하게 되었다. 부러움은 점점 질투심으로 변해 늘 가슴 한편에서 뜨겁게 끓어올랐다. 무엇보다도 재수생이라는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헐떡이고 있던 내게 그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게다가 내가 죽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양심마저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나는 이제 오래전에 이미 소멸해 버린 내 아바타에게 조의를 표하려 한다. 그는 꼭 십 년 전 내게서 떠나갔다. 실존하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들러붙어 절대로 놓아주질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두 가지 방법 외엔 달리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다. 벼랑 끝이라도 뛰어내릴 각오로 전력 질주하여 그에게서 도망치거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선택은 각자의 성향과 사고방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나? 나는 어리석게도 후자를 선택했다. 처음 그가 느닷없이 나를 떠나가던 날,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재능과 기호, 심지어는 그의 버릇까지 모두 흡수해 버리려 했다. 그렇게 나를 사라져 버린 형과 철저하게 하나로 통일시켜 나갔다.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이 그에게 흡수된 거였지만.
그날, 술자리에서 역할 바꾸기 게임을 하던 그 시간, 나는 처음으로 삶에 대한 애착이 뱃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그날은 주목받지 못한 채 늘 주변인의 삶을 살던 내가 무한한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유일한 날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형을 볼 때마다 묵직한 좌절감을 느껴야 했던 내가 말이다. 그 좌절감은 '내가 죽어줘서 다행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자리를 탐냈는지 모른다. 그가 명문대에 입학하던 그날,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나보다 한 해 먼저 취학통지서를 받던 유년의 어느 시절부터 난 그의 삶을 격렬히 질투해 왔던 거다. 사실 그를 향한 내 질투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 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를 미워했던 내 마음의 깊이와 그가 되어 가는 과정 사이에는 당최 아무런 연관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닮아가고자 할수록 어느새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처 놓고는 형은 저만치 먼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마치 자신을 닮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부모님 역시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으셨는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으셨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K는 얼마나 재밌었을까. 오 년의 세월을 거슬러 나를 찾아온 K,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사는 자에 대한 동료의식? 아니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형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도 아니면 운명은 게임의 규칙처럼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인력으로는 절대로 인생의 법칙을 바꿀 수 없다는 끔찍한 진실?
나는 비로소 내 등에 달라붙어 있던 아바타를 떼어 내려고 한다. 형이 다시는 나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련다. 온전한 나를 다시 찾는 일이 가능은 할까? 내 인생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침몰해 갈지 모른다. 그래도 이젠 그 누군가가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다.
게임 오버. 모든 게임이 끝났다. 이젠 게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어쩌면 나를 움켜쥐고 있던 형이 이제야 겨우 나를 놓아주려는 건지 모른다. 십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버린 지금에야 말이다.